HOME                로그인

시절 푸른 사람들의 이야기
‘위기의식’(危機意識)


글 황영삼 마태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누구나 경험해 보았고 누구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렇기에 쉽게 변하기 힘든 것들이 있습니다. 꼭 변해야만 하는가? 본질은 변하지 않더라도 그 밖의 모든 것은 시대의 요구와 변화에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에 우리 모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대응하지 않으면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톨릭교회가 200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 물론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 시대를 이끌어 가든지 아니면 시대의 요구에 파격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최근 100년 동안 시대가 너무 빨리 변하고 있어서 이전의 제도와 구조가 잘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되는데, 이마저도 느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사실 두렵습니다. 우리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지역이, 대한민국이, 전 세계가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위기의식’(危機意識) - 인간 본래의 가치, 질서를 잃는 데서 느끼는 불안과 절망 의식 -

‘위기의식’은 생존 본능에서 나옵니다. ‘지금 무언가를 해야 되는 건 아닐까?’ 이 질문이 인류를 성장시켜 왔고 때로는 본질을 바라보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나쁜 생각이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이고 오히려 없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위기의식을 갖지 못한 사람,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리더인 공동체가 살아남으려면 변화의 열정을 구체화시키고 시대를 잘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조언과 도전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어야 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라면 리더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지혜롭고 우직한 2인자가 옆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사람은 그런 리더와 참모의 뜻이 잘 전달되도록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의 씨앗이 바람을 타고 잘 전달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를 결정하는 사람, 그 사람을 가까이에서 도와줄 사람, 그것을 흐름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자리를 잘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위기의식이 어설프게 작동해서 나오는 흐름이 있습니다. ‘탐욕, 악의, 사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마르 7,22)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전 우리 교구 학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효성가톨릭대학교’ 교명을 ‘대구가톨릭대학교’로 바꿀 때 신학생이어서 대학교에 좋은 기억이 없습니다. 지방 대학이 어렵다고 이미 수십 년 전에 이야기 나올 때 ‘학교 운영을 교회가 하는 게 이 시대에 맞는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부정적이었습니다. 한 번씩 지방 대학의 어려움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이런 걱정을 하는 분들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살아본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교회가 학교를 지키고 있어야 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라는 판단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살아 보니 우리 학교의 변화를 느리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이 무엇인지 이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학교는 매년 2000명이 넘는 학생이 들어오고 그 학생을 가르치고 학교를 운영하는 수백 명의 교직원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좋은 이야기만 오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고 불만들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불만의 대부분이 불만이 습관화된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시기와 중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더하여 이런 상황과 분란을 관망하며 즐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무 가슴 아픈 현실은 이런 문화가 우리 학생들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수의 학생들이지만 성적에 밀려서 지방대에 왔다는 불만을 시작으로 새 삶을 시작하다 보니 친구들을 사귀지 못하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 이 좋은 시기에 학업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의 존재는 드러내고 싶고 공감받고 싶어서 자신의 불만을 익명으로 표현하고 분란의 씨앗을 키웁니다. 그렇게 스스로가 소속된 공동체를 비하하고 낮추며 스스로도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친구들이 제대로 일어나 새로운 삶, 변화의 순간을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걱정을 하다 보면 지금 나에게, 혹은 우리 기성세대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현재 지방 인구 감소와 낮은 출생률로 기존의 제도와 구조를 가지고 있는 모든 공동체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이제는 걱정과 고민의 시기가 아니라 행동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어쩌면 늦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안심이 되는 것은 그런 불만과 나태함 가운데에도 희망을 찾는 사람이 있고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삶을 응원하고 세상을 직시하되 바르게 볼 수 있도록 먼저 살아 보여 주고자 하는 ‘먼저 나서 살고’ 있는 선생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 학교도 희망적입니다. 또한 그런 선생들을 믿고 최선을 다하려는 학생들이 있기에 희망적입니다. 그래서 저도 희망을 찾으러 그들 안으로 다시 들어가 봅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희망’으로 불리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