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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칼럼
“침묵”


글 정태우 아우구스티노 신부|이곡성당 주임

 

한티순교성지로 연중 피정을 다녀왔다. 팔공산 깊은 자락에 자리 잡은 한티는 대구 시내에 비하면 한결 시원해서, 수행의 한 주간을 보냈다기보다는 어째 사치스러운 피서를 하고 온 느낌이다. 실제로 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몇몇 동료 신부들에게서 “며칠 더 하면 좋겠구만 아쉽네.”하는 소리를 들었다. 피정은 다들 아시는 대로 잠시 일상을 벗어나 조용한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굉장한 호강이 아닐 수 없다. 큰 부자나 권력자라 하더라도, 한 주일이나 세상을 떠나 고독과 침묵을 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꼭 시원한 날씨가 아니더라도 좀 더 있고 싶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하다.

하지만 피정을 시작하는 처음 하루 정도는 적응하느라고 조금 애를 먹는다. 무엇에 적응하느냐 하면, 바로 정적이다. 피정 기간에는 절대 침묵을 지키는데,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 휴대전화나 SNS 같은 통신도 하지 않으며, 문 여닫는 소리 같은 일상 소음도 극력 조심해서 내지 않는다. 이런 물리적인 침묵은 내면의 침묵을 몸가짐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면의 침묵은 바로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자세,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므로 잠잠히 그 말씀을 듣고자 하는 기도의 자세이다. 그러므로 침묵은 피정의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가 않다. 떠들썩하고 산만한 환경에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니 어쩔 줄 모르겠는 것이다. 우선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울리던 휴대전화가 잠잠한 것만으로도 평소의 생활 감각과는 너무 다르다. 하지만 일상을 떠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피정인데, 이렇게 단절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일상을 떠나겠는가. 어색하고 난처한 정적을 참으면서 마음을 거두어 한나절쯤 앉아 있다 보면, 눈이 밤길에 익숙해지듯이 고요함에 조금씩 젖어들게 된다. 그러고 나서야, 이렇게 안팎으로 고요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소리, 육신의 귀가 아니라 영혼으로 들어야 하는 소리가 비로소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다.

온갖 기대와 염려의 안쪽, 감정과 기억과 의식보다 더 깊숙한 곳에, 내 영혼이 거처하고 있다. 여기가 바로 지성소, 하느님을 만나 뵙는 곳이다. 이 지성소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말씀은 천둥이나 바람소리처럼 요란하지 않고 잔잔해서, 소란스럽고 산만한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시끄러운 환경에 너무 익숙해져서 조용히 있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지도 모른다. 각종 말초적인 자극에 연달아 노출되다 보니 잠깐이라도 자극이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의 겉쪽에 온갖 잡것들이 노상 장을 펼치고 법석을 떨고 있으니, 언제 이 깊은 곳에 들어와 자기 자신을, 또 주님을 만날 것인가?

이 바쁜 세상에 며칠씩이나 시간을 내어 피정을 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답답함과 무료함을 참고 일부러 정적을 찾아 떠나기는 더욱 쉽지 않을 것 같다. 필시 오늘날의 문화와, 또 거기 길들여져 있는 우리 생활습관과 너무나 이질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침묵이 절실하다. 우리 삶의 많은 병통이 침묵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결과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루에 다만 몇 분이라도, 전화기를 끄고 컴퓨터나 TV 앞을 떠나 마음속의 한티를 찾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