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시간에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한다. 요즘 MZ 세대에 ‘텍스트힙(Text-Hip)’ 문화가 한창이란다. 책을 멀리하는 세대라 하지만 의외로 고전 읽기에 열심이란다. 고전을 읽으면서 ‘힙한’, 다시 말해 ‘있어 보이고픈’ MZ 세대의 풍경이 새롭다.

우리 신앙인은 어떨까.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다시 성경을 잡는 경우가 꽤 많다. 성경을 많이들 읽고 쓴다. 쓰면서 읽기도 하고 읽다가 꽤 괜찮은 구절을 옮겨 적기도 한다. 신앙인이라면 성경 읽기에 지쳐서는 안되고 말씀에 대한 열정을 신앙의 척도로 여기는 건 당위에 가깝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만’을 읽는 게 아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을 그토록 위대한 신앙의 유산으로 만든 결정적 포인트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경의 저자들은 ‘한 권’의 책을 읽고 외워서 자신의 지면에 고스란히 옮겨 놓는 게으른 일꾼들이 아니다. 성경의 결정적 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 1-11장의 이야기는 대부분 고대 근동의 오래된 이야기들을 읽고 세상과 인간에 대한 묵상과 해석을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관점에서 새롭게 구성한 작품이다. 특별히 구약의 지혜문학들은 당시의 수많은 타민족의 지혜문학들과 헬레니즘의 철학적 사상들을 섭렵한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신약의 바오로 서간이나 복음서들 역시 구약의 여러 이야기와 당시 유행했던 묵시문학적 작품들, 그리고 영지주의적 작품들을 읽고 예수께서 가르친 바를 바탕으로 재해석한 결과물들이다. 요컨대 성경의 저자들은 다양하게 읽고 다양하게 해석해서 자신들이 처한 삶의 자리 위에 신앙의 창조적인 전망을 제시한 이들이다. 성경이 거룩하고 위대한 건 알아듣기 힘든 천상의 진리와 신비가 스며들어 있다고 믿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수많은 역사의 과정마다 수많은 이야기들을 마주하고 고민한 저자들의 다독(多讀)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다독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사상, 하나의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세세대대로’ 모든 이에게 열린 글로 거듭났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을 읽고 자신의 삶에서 재해석한 수많은 교부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신앙인들은 세상을 읽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아갈 새 세상을 설계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리하여 성경은 매순간 살아 있는 말씀으로 터져 나왔다. 어떻게 보면,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들과 읽을거리가 없었다면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기록들은 단단하고 깊은 울림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앙의 읽을거리들은 세상과의 호흡 안에서 제 맥박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사변적 신학을 공부하든, 실천적 신앙을 살아가든, 읽는데 소홀한 경우, 신앙은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성형과 신앙 서적을 읽고 공부한다면서 세상의 다양한 생각들과 현상들에 가타부타 말이 없는 건, 세상을 몰라서, 세상을 읽지 않아서, 우리 것만 읽는 것에 과도한 성성(聖性)을 부여해서, 그리하여 세상 것들은 ‘세속의 하찮은 것들’로 여기는 편협함의 방증(傍證)이다.
책을 한 권만 읽는 사람이 무섭다고 한다. 성경만을 읽고 세상을 가르치려 들거나 몇몇 신앙 서적을 읽고 진리를 꿰찬 듯 뿌듯해하는 이들의 설익은 이야기들은 사실 무지에 가깝다. 성경의 지혜는 수많은 인문학 서적들과 예술과 문학, 그리고 영화와 음악 안에서도 정확히 발견되는 경우가 허다하며 오히려 성경의 ‘표현들’보다 더 세련되고 감각적인 것들로 읽혀질 때가 많다. 세상, 나아가 우주를 창조하신 분의 지혜는 우리‘만’의 글과 읽기로 대변되지 않는다.
하여, 다양한 책을 읽는 것은 말씀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한 신앙의 일과 같다. 소설이든, 시든, 에세이든…, 무엇이든 집어 읽기를! 읽으면서 하느님을 상상하기를! 그리하여 제 표현과 말과 생각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드러내기에 얼마나 얕고 부족한지 깨닫기를! 이 가을에 나의 기도 안에 다시 한번 되새기는 반성이자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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