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교우에게 작은 포인세티아 화분을 선물로 받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잎이 거지반 말라 떨어져 버렸다. 글쓴이에게는 식물을 돌보는 재주가 유난히 없어서 꽃이든 나무든 방에 들여 오기만 하면 금세 죽고 만다. 전에는 담배 연기 때문이겠거니 했었지만, 담배를 끊은 지 9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글쓴이 곁에서는 화초가 자라지를 않는다. 이번에도, 어차피 곧 죽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주는 사람의 기분을 생각해서 받아 둔 것이었다. 물도 자주 줄 필요 없고 그냥 내버려두어도 잘 큰다는 말에 약간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결국 두 달도 버티지 못하고 또 시들어 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어째서 이렇게까지 화초들에게 기피를 당하는 것일까? 글쓴이의 할머니는 유난히 꽃을 사랑하셔서 90이 가까운 고령에도 집마당에 목련이며 샐비어, 제라늄 같은 크고 작은 꽃나무들을 가꾸셨다. 어머니도 꽃피우는 재능이 있으셨는데 생전에 이웃 사람들이 난초나 작약 같은 화분을 들고 와서 돌봐 달라고 부탁하곤 했었다. 그런데 글쓴이는 그런 좋은 능력을 도무지 물려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명색이 성직자라는 사람이 손만 대면 생명이 피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멀쩡히 살아있던 것들도 말라죽고 마니 말이다. 서운하기도 하고 분한 마음도 좀 들어서,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용을 써 보기로 했다.

통풍이 잘 되는 곳으로 자리도 옮겨 보고, 물주는 간격과 시간이 중요하다고 해서 휴대전화에 타이머까지 설정해 두었다. 이리저리 물어보고 책도 찾아보고, 영양제까지 한 통 샀다. 어머니가 하시던 것처럼 매일 노래를(!) 불러 주지는 못하였지만, 조석으로 문안도 드렸다. 그러구러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듬성듬성하던 대궁이 끝에 조그마한 순이 돋아 있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여기저기에 꼬마 잎사귀들이 두세 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기뻐한 적이 언제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아직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새순들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여다보면서, 혹시라도 도로 시들어 버릴까 봐 걱정을 하면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생명을 기르는 일에 이렇게 진심으로 애를 태우고 안절부절 노심초사하기는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야 할 일을 처리한다는 느낌으로 남의 일 보듯 했지, 애틋한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여서 감싸 안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화초 한 그루가 살고 죽는 것은 어찌 보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지구의 어느 동네에서는 전쟁이 나서 하루 사이에 몇 천의 인명이 희생되기도 한다. 하지만 작은 초목이라도 시드는 것을 안타까워 할 줄 모른다면, 사람의 목숨인들 귀하게 여기겠는가? 말 못하는 짐승에게 냉랭하고 무심하던 사람이 이웃에게는 따뜻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는가? 크든 작든 생명을 대할 때는 그 주인을,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신 인자하신 분을 기억해야 한다.
곧 죽을 것 같던 포인세티아는 무럭무럭 자라서 이제는 분갈이를 해야 될 만큼 커졌다.(분갈이라는 말도 이번에 처음 배웠다.) 또 시들시들하면 어쩌나 마음이 쓰이지만, 다른 한 편 역경을 뚫고 힘차게 자라는 강인한 모습이 감격스럽기도 하다. 천지간에 가득 찬 피조물을 통해 당신 자녀들에게 호생지덕(好生之德)을 가르치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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