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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의 해를 위한 생태영성
아름다움


글 송영민 아우구스티노 신부|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국장

얼마 전에 후배 신부가 안부 인사를 전하며 울릉도에서 찍은 일출사진을 보내왔습니다. 태양이 그 찬란한 얼굴을 수평선 위로 내밀며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인 풍경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더군요.

 

햇살을 머금은 십자가도 따뜻하고 평화롭게 보였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해돋이 풍경을 보고 있으니 새삼스레 “아침 햇살을 통해 주님께서 ‘굿모닝’ 하시는 것을 느낀다.”라던 어느 학생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러고 보면 자연의 아름다움은 잠들어 있던 우리의 감각을 일깨워 영적 감수성을 풍부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창조주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반영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341항의 이 가르침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경치 좋은’ 수준을 넘어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사하고 반영하며 ‘하느님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은 ‘하느님을 숨기고 있는 면사포’와 같아서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바라보려는 노력은 하느님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효율성을 중시하고 기능적인 것을 더 앞세우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 창조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여유가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보다는 인공적인 화려함에 마음이 기웁니다. 「찬미받으소서」 회칙의 말처럼, “우리는 대체할 수 없고 회복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34항) 그렇게 우리의 눈길이 진정한 아름다움과 멀어져 가는 가운데, 우리네 마음도 자연의 아름다움이 파괴되고 사라져 가는 현실 앞에서 무디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생태영성은 아름다움과 다시 가까워지도록 초대합니다.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만 초점을 둔 나머지, 하느님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만나는 기쁨까지 잊어선 안되겠지요. 물론 생태 위기에 정직하게 직면하고 그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는 있지만, 계속해서 문제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부정적 이야기 피로감’만 쌓이게 될 것입니다. 때론 우리 공동의 집 지구에 대한 걱정도 내려놓고, “아름다운 것을 경탄하며 음미하는 법”(「찬미받으소서」, 215항)을 배울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네 일상 속에서 매일 해처럼 떠오르는 아름다움을 마주하며 창조의 신비를 느끼고, 그래서 기쁘게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여유를 갖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움과 가까워지며 영적 감수성이 자랄 때, 우리는 아름다움(美)과 반대되는 추(醜)한 것에 좀 더 민감해질 수 있습니다. 마치 피정을 깊이 한 후에 죄와 악을 식별하기 쉬운 것처럼, 우리가 아름다움과 가까워질수록 추한 것을 쉽게 알아보고 그것을 피하려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가까워지는 것은 단순히 ‘낭만적’인 일에 그치지 않고 ‘윤리적’인 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신비를 느끼게 되면, 그 아름다운 신비로 빛나는 세상을 지키고 돌보고 싶은 열정이 생기지 않을까요?

 

이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하느님 창조의 아름다움이 잘 보전된 세상을 만들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사랑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 아름다운 것을 심지 않으면서 이 세계의 황폐화에 대해 슬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일도 우리 눈앞에 떠오를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지막까지 그 아름다움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우리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작은 세계는 하느님의 아름다움으로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돌보려는 그 실천이 결국 나를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잊지 맙시다. 하느님의 아름다움,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나의 아름다움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