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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푸른 사람들의 이야기
인센티브(incentive)


글 황영삼 마태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상대를 설득하고 싶다면 이성이 아니라 이익에 호소하라.” - 벤저민 프랭클린

“사람들은 조언이 아니라 인센티브를 따른다.” - 제임스 클리어

 

누군가가 스스로 관심을 갖고 움직이게 하는 힘은 그가 얻을 ‘이익’(동기)에 있습니다. ‘얻을 것’이 없다면 무언가를 행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이익 때문에 움직인다고 그 사람을 속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작동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학교가 어떤 학생을 만들고 싶어 하는지를 이해하려면 그 학교의 장학제도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학교는 단순히 성적만 뛰어난 학생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한 인재를 양성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스텔라’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특강이나, 문화체험, 행사, 동아리 등에 신청하고 체험하면 이 스텔라를 모을 수 있고 이에 따른 장학금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아무리 좋은 특강이나 좋은 행사를 기획하고 제공해도 학생들이 오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스텔라’라는 ‘인센티브가’ 있으니 처음에는 그것을 보고 학생들이 오겠지만 그곳에서 보고 들은 각자의 체험이 또 다른 가능성과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학생에게도 좋고, 학교 입장에서도 좋은 결과를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스텔라’ 뿐만 아니라 ‘돈’이라는 금전적 지원도 해 주는 모임이 있습니다. 학교의 대외활동에서 안내와 도움을 맡으며 학교 학생들의 이미지를 맡고 있는 ‘홍보대사’(아마레띠)는 그만큼 자기 관리와 근로에 준하는 시간을 필요로 하기에 금전적 지원도 해 줍니다. 또한 저희 ‘인성교육원’ 소속 신부들이 운영하고 있는 ‘인성캠프’에 속한 ‘멘토’들도 매주 1박 2일 행사를 함께 뛰어야 하니 지원을 해 줍니다. 지원해 주는 입장에서는 그 학생들이 1학년(멘티)들의 선배로서의 품행을 단정히 하길 바라고, 실질적으로는 그 학생들이 주말 ‘알바’를 포기해도 될 만한 보상을 해 주면서 책임감을 가지고 교육받고 체험하여 성장하길 바라고 진심으로 이 캠프에 집중해 주길 기대합니다. 그렇게 신부들의 노력과 매 학기 새로 뽑히는 30명의 멘토 학생들의 수고 덕분에 많은 학교들이 부러워하며 아마도 전 세계에서 우리 학교만이 가능한 ‘인성캠프’를 운영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열정페이’라는 말이 언제부터인가 만들어졌습니다. 정당한 대가 없이 그들의 열정을 요구하며 일을 진행하는 것이 불합리하게 여겨지면서 이 단어가 만들어졌습니다. 예전에는 ‘잘 보이기 위해’, ‘아랫사람이라서’, ‘나도 그랬으니까’라는 여러 가지 이유로 행해지던 것들이 더 이상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공감되는 시대가 와 버렸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 상황에서 당당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혹시나 ‘신앙 페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는 또 다른 ‘열정 페이’가 우리 안에 있지는 않았을까 반성해 봐야 합니다. 벌써 10여 년 전부터 본당의 반주자가 없다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제가 있던 한 본당에서는 새벽미사 반주를 담당하던 할머니께서 어느 날 미사 후에 한숨을 푹 쉬시면 한마디 말씀하시고는 더 이상 반주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신부님, 이제 악보가 안 보입니더.”

20년 전부터 이 상황은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한 성당에서 현악기로 반주하던 청년이 교중미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전공 교수님이 자기 교회(개신교)에서 반주 도와달라고 했는데 저만 못 가서 기분이 좀 그래요.”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대견했습니다. 이 친구가 한 말속에는 학교 안에서 자신의 위치, 교수님과의 관계,

개신교에서 주는 정당한 봉사료(당시 8만 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고, 정돈된 말로 집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해 준 청년이 오히려 저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우리는 왜 이 젊은이들, 젊은 음악가들에게 신앙과 관계, 열정만을 요구하고 있을까? 이렇게 가다가 우리 교회 안에 누가 남아서 반주를 하고, 좋은 목소리로 봉사를 하고 지휘를 할까? 적어도 그들이 ‘알바’ 걱정하지 않을 정도, 혹은 그들의 기술과 재능을 지원해 주는 목적으로라도 금전적인 지원을 왜 해 주지 못할까? 라는 고민이 들었습니다. 봉사와 봉헌은 그들이 투자와 노력으로 이루어 낸 재능과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정당한 대가로 그들이 스스로 봉헌하는 게 정상이지 않을까?

그렇게 투자없이 20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큰 변화의 시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더더욱 전문적인 봉사를 기대하기 힘든 시간을 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인센티브’는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물론 이 동기가 잘못 작동되면 오류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 오류를 걱정하기에는 우리 교회 안에 ‘동기’를 유발하는 ‘인센티브’ 자체가 있는지부터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부디 고민의 시간이 길지 않기를 바랍니다.

 

학교 안에서는 신자-신부-수도자라는 공식이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학생과 교수에서 시작된 관계는 어떤 ‘동기’를 만나서 청년과 신부의 만남이 되고 그 시간을 지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됩니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고 나면 학생은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저를 존중해 주기 시작합니다. 이 정도의 관계가 되면 그 어떤 이야기도 오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학생들의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하지만 그 시작이 되는 ‘인센티브’가 없었다면 너무 먼 길을 돌아가거나 아니면 그 출발도 불가능하지 않았을까요? 학생들의 4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니까요.

오늘도 이렇게 시대와 종교를 벗어난 ‘벗’이 되는 길이 우리 학교에서는 실현되고 있습니다. ‘벗’이 되길 원하셨던 예수님이 원하시는 시간을 살아갈 수 있어서 오늘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듯합니다. 좋은 동기가 마련되어 함께 성장하고 발전하는 우리 학교, 우리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