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영일 작가가 지구를 지키자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폐플라스틱 병뚜껑 삼만여 개로 시민들과 함께 협업하여 만든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색깔과 위치를 고민하며 붙인 병뚜껑 하나하나에는 더 나은 지구를 만들고자 하는 참여자들의 희망이 담겨 있는 듯 했습니다. 버려지는 플라스틱 병뚜껑으로 육지와 바다의 모양을 그려내는 모습,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모여 멋진 모자이크 작품으로 거듭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곳에서 희망은 자란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데 한가하게 지구 모형이나 만들고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플라스틱으로 인해 생기는 환경 문제를 실감할 수 있도록 좀 더 공격적인 캠페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플라스틱 폐기물이 급증하는 현실을 직면하고 그 문제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고 버리는 것들은 단순히 쓰레기가 아니라 재사용되고 새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만 이야기하지 말고,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생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는 일부 환경 운동가들이 지나치게 부정적인 현상만을 강조하며 공포심을 조장하는 경우를 보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술 작품처럼 지구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미술관의 명화나 역사적인 건축물을 훼손하며 기습 시위를 벌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대중들에게 변화를 촉구하려는 그들의 열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공포 메시지가 자칫 사람들을 움츠려 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과격한 시위가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반발심만 키우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문제의 심각성만 강조하는 방법으로는 진정한 생태적 회심을 이룰 수 없습니다. 담뱃갑 겉면에 표기된 섬뜩한 경고 문구나 사진이 기대한 것만큼의 행동 변화를 끌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재앙적인 기후 변화 이야기만 되풀이해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반면에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희망’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에 나서게 합니다.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작은 희망이라도 발견한다면, 그것을 위해 우리는 다소간의 불편을 감수하고 희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은 우리를 변화 앞에서 주저하게 만들지만, 희망은 우리를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람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뭔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없을 때 단기적인 시야에 갇혀 새로운 변화에 무관심해집니다. 이런 점에서 기후 위기보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희망의 끈을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갈수록 심각해지는 생태 위기 속에서 우리의 미래가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곳곳에서 희망의 징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구 평균 온도 1.5°C 상승은 불가피할지 모르지만 2°C 아래로는 막을 수 있다는 희망, 여섯 번째 대멸종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다른 멸종 위기종을 보호할 수 있다는 희망,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태 인지 감수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희망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너무 먼 희망이라고는 말하지 맙시다. 지금은 기후 변화와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고 실망할 때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미래를 기대하며 ‘응원가’를 불러야 할 때입니다. 응원가는 우리 팀이 지고 있을 때 더욱 큰소리로 불러 줘야 하는 노래이듯이, 현재의 지구 공동체는 씩씩하게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필요로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찬미받으소서」 회칙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노래하며 걸어갑시다! 이 지구를 위한 우리의 투쟁과 염려가 결코 우리 희망의 기쁨을 앗아 가지 못합니다.”(244항) 이 초대를 따라 우리가 시대의 어두운 면에 움츠려 들기 보다는 가장 먼저 희망을 갈망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희망을 위한 실천에 땀흘리는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희망을 만들어 가는 이에게 역사의 암흑기는 반대로 창조적 시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절망적으로 보이는 이 시기가 오히려 새로운 시도와 근본적인 변화들이 일어나는 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라는 시간은 절망의 시간이 아니라 희망에 찬 활동을 위한 시간이어야 합니다. 의식의 변화와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생태적 희망을 현실화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희망 안에서 생태적 회심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때, 지구라는 공동의 집은 다시 회복될 것이며 그 미래는 지속 가능할 것입니다. 네, 많이 늦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습니다.”(「찬미받으소서」, 20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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