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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시선
예수님의 경제학


글 이재근 레오 신부|월간 〈빛> 편집부장 겸 교구 문화홍보국 차장

 

직업에는 정말로 귀천(貴賤)이 없을까?

똑같은 한 시간을 일해도 일용직 노동자와 대기업 임원의 수익은 다르다. 똑같은 수익이 발생한다 해도 땡볕에서 일하는 것보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아무래도 직업에는 귀천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이 천(賤)의 직업을 선택하지 않도록 그들을 다그칠 수밖에 없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경제학의 핵심은 선택이다. 무한한 인간의 욕심에 유한한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의 기준은 ‘인간의 이기심’과 ‘이익’이다. 처음에는 되도록 많은 사람의 이기심을 위해 선택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있는 사람의 이기심이 기준이 되었을 것이고 힘없는 자들의 이익은 방치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직업의 귀천이 생겼을 것이다. 적게 일하면서 돈은 많이 벌고 그러면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자리를 모두가 원하게 되었다. 요즘 아이들이 건물주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현상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기심과 이익으로 대변되는 경제학에서 예수님은 어떤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셨을까?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예수님의 경제학은 이 성경 구절에 요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과부에 주목해 보자. 과부는 예수님 시대 때 대표적인 약자 가운데 하나였다. 남편을 잃어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기에 가난할 수밖에 없는, 주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다. 따라서 그 당시에도 발 벗고 나서서 과부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를 헌금함에 넣었다. 바보같은 행동이다. 그렇다면 왜 과부는 이처럼 행동했을까? 아마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가난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를 잘 알기에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이 행동에는 그 사람보다는 내 처지가 나은 것에 대한 감사와 거기에서 비롯된 양보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경제학’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경제학의 두 기준, 이기심과 이익 사이에 ‘감사’가 들어가길 바라신다. 이기심과 이익에 감사가 결합되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이 ‘양보’이다. 나보다 힘든 사람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양보하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자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선이 동반된 경제학은 모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게 되어 있다.

 

가톨릭은 세상에 예수님의 경제학을 전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라고 외친다. 감사가 결합될 때 우리의 삶이 엄청나게 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늘 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