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사 지향이 한 달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작은 시골성당에도 연미사가 급격히 늘어나는 시기가 있습니다. 바로 오봉(일본 명절)이 있는 8월과 위령 성월인 11월입니다. 평소의 미사 지향도 생미사 보다는 연미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돌아가신 분의 기일(周忌、回忌)마다 미사 지향을 올리시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8월 중순과 11월 중에는 기일과 상관없이 선조들을 위한 연미사를 부탁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세상을 떠난 가족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전통을 소중히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신자가 아닌 분들도 친족의 연미사에 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소위 무신교라고 자칭하는 분들도 사후 세계에 대한 일종의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대화 중에 느낄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수많은 장례미사를 드리며 느낀 것 중 하나가 생자와 사자(삶과 죽음)의 물리적 혹은 정신적 거리감이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깝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삶과 죽음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두지 않으려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외상이 심각한 사고사 혹은 부패가 진행된 고독사 외에는 입관을 하고 나서도 고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장례미사와 고별식까지 치르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장례미사 전 오츠야(고인과 마지막 밤을 보내며 추모하는 예절)를 지낼 때에도 조문객이 고인의 시신을 마주하며 향을 올리거나 기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또 성당에서 출관 후 화장한 뒤에도 49일간(불식 장례 문화의 영향) 혹은 일정 기간 동안 신자 분의 가정에 유골을 모시고 함께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에서는 주택가 곳곳에서 소규모의 공동묘지를 발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세상을 떠난 이들과의 물리적 정신적 거리감이 가깝습니다. 한국에서는 님비 시설인 납골당과 공동묘지가 주택가와 성당에 당연하다는 듯 자리잡고 있지만 사람들이 꺼리기 보다는 오히려 형편이 된다면 본당에도 납골당과 묘지가 있기를 바라는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주거지와 생활 공간을 공유할 만큼 망자와의 경계를 두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지난 사목지였던 유쿠하시 토요츠성당과 후쿠오카 죠스이도오리성당에도 본당 신자들을 위한 납골당이 있고, 후쿠오카 차야마성당에는 고토 출신의 신자 분들이 관리하는 본당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그러한 일본의 사생관과 장례 문화는 어쩌면 삶의 연속성과 영원을 갈망하는 인간의 무의식이 반영된 일종의 말씀의 씨앗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삶과 죽음(주거지와 무덤)이 공존하는 일본 주택가의 풍경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복음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늘과 땅을 이어 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천상과 지상을 하나로 이어 주었다는 것을 우리는 미사성제 안에서 늘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사 중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삶과 죽음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산 이와 죽은 이가 하나로 이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현생과 내생의 연속성 안에서 죽음을 직시할 때 오히려 우리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꺼리기 보다는 주어진 생을 더 소중히 살아야 함을 느끼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일본의 주택가에 자리한 공동묘지는 삶과 죽음이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두 현실이 생명을 향한 하나의 여정이라고 말해 주는 듯 합니다.


구원 경륜이 하느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앙상블이듯 하느님 나라도 죽은 뒤에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삶의 자리에서 하늘과 땅이 서로 ‘경계를 뛰어넘어’ 함께 이루어 가는 앙상블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묵상할 때 자주 감탄하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이 만든 울타리와 경계를 항상 뛰어넘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궁극적으로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마저도 뛰어넘어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셨습니다.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지만 세상의 울타리를 초월하여 온갖 속박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보편적 해방과 자유의 관점에서 볼 때 현 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도 이제껏 세상이 고수해 온 어떤 울타리나 경계를 뛰어넘어 구원으로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노력이자 성령의 이끄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라는 교회 내의 조직적 울타리를 넘을 뿐만 아니라 제문화와 제종교 간의 대화, 경청, 식별로 이어지기 위한 영적 소통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제품을 받은 이래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미사 중에 늘 기도하고 있는 저는 특히 위령 성월에는 인간의 죄와 나약함보다 항상 더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탁하며 자기 생명을 스스로 포기한 이들의 영혼을 위해서 간절히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죽음마저도 뛰어넘으신 주님처럼 우리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세상을 떠난 이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가오는 위령 성월에는 세상을 떠난 이들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의 삶의 자리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경계를 뚫고 우리와 하나되신 것처럼 사람과 사람, 종교와 종교, 문화와 문화, 전통과 전통, 이념과 이념 사이의 장벽을 뛰어넘어 다양성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는 새 하늘 새 땅의 완성을 바라며 기도하고 싶습니다.
11월 징검다리는 일본의 위령 성월과 장례 문화에 대해 짧게 언급한 뒤 현재 제가 사목하고 있는 타케오성당에 대해 나누려 했지만 글을 쓰다 보니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12월호인 마지막 징검다리에서는 일본에서 유치원 원장직을 겸임하며 느낀 것을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추신 : 이번 호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타케오성당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 드립니다. 타케오성당은 일본의 전통가옥(古民家, 고민가)을 개조한 성당이라서 신발을 벗고 다다미(일본 전통 바닥재)에 앉아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도 다국적(필리핀, 베트남, 콜롬비아, 미국, 한국, 일본)이며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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