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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푸른 사람들의 이야기
비극은 갑자기, 기적은 오래 걸린다


글 황영삼 마태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아차!’ 느낌이 좋지 않았습니다. 학교 안에서 서로 잘 아는 학생이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을 했고, 그 친구가 세례를 받으면 어떨 것 같은지를 다른 신자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답변은 ‘정말요?’, ‘우와’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 당사자가 앞에 있으니 - 하지만 정말 생각지도 않은 솔직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아무 생각 없는데요.”

 

부끄러웠습니다. 세례 받길 준비하는 학생이 시작부터 축하받고 기존 친구들이 기다려 주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는데 전혀 반대의 분위기를 들키고 말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심지어 그 대답을 해 준 친구는 교리교사까지 하고 있는 친구였고 행실도 바른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어쩌면 너무 일반적인 답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잘못 가르친 신앙 선배들의 탓이고, 아무 생각 없이, 감동 없는 신앙을 살고 있는 우리의 탓이 아닐까 반성해 봅니다.

저부터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자 교수를 봐도, 냉담하고 있음을 밝히는 선생님들이나 교수, 학생을 봐도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저 자신을 봅니다. 활동하는 신자들의 부족하고 안타까운 점이 먼저 보입니다. 세례를 받는 학생들을 보면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될 희망찬 미래보다는 세상살이 십자가를 지고 갈 모습이 먼저 보여 안타까운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부터 신앙인으로 무언가 잘못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사람이 한 명 만들어지려면 엄청난 경우의 수를 거쳐야 합니다. 먼저 남자와 여자가 만나야 하고 그들의 엄청난 노력과 자연의 노력으로 1000억 개가 넘는 신경세포가 제 기능을 다하고 수십 개의 기관이 잘 작동되어야 한 생명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너무 간단한 과정입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해서 - 부상이든 질환이든 - 혈액과 산소가 부족하면 죽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기적에 가까울 만큼 복잡하지만 비극과 죽음은 허망할 만큼 단순합니다.

이스라엘을 준비시켰던 구약의 시간과 예수님의 신약의 시간, 이후 성령의 시간을 4000년 정도라고 한다면 - 물론 창조 때부터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 지금 내가 하느님을 알고 그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오랜 시간을 지낸 ‘기적’입니다. 하느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원한다면 매일미사를 드릴 수 있고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는 시대와 나라 안에 살아감도 기적입니다. 당당히 천주교인이라고 말해도 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고 심지어 저처럼 신부라는 성직자로 살 수도 있습니다. 기적입니다. 이 기적들 안에서 우리는 항상 살피며 살아야 합니다. 신앙감이 개인화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신앙인의 의무와 사명까지 잃어버린 건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그 성찰이 피를 돌리고 숨을 쉬는 과정의 시작입니다. 힘들지만 그 과정을 한번 놓치면 비극을 보게 됩니다.

 

종교 관련 기사를 보면 ‘탈종교화’라는 단어가 많이 보입니다. ‘젊은이들이 종교를 떠나고 싶어 한다. 기성 종교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젊은이들 안에서 살아보니 그냥 종교에 관심이 없습니다. 마치 과거에 유명한 의류 브랜드가 지금은 더 이상 관심받지 못하는 - 그래서 무엇을 파는 브랜드인지도 생소한 - 그 정도의 수준입니다. 세상에 할 것,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종교가 보이지 않는다고 일부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부족합니다. 지금 대다수 많은 젊은이들은 당장 어떻게 살아 내야 할지, 무엇을 해야 되는지가 고민이지, 하고 싶은 것이 많고 할 것들이 많은 젊은이들은 사실 소수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답을 젊은이들은 찾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삶의 고민은 과거의 젊은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탈종교화’의 문제에 대처해야 할 그 시작은 ‘우리가 매력을 잃었다.’에서 출발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번 학기에도 몇 분이 세례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예비신자 교리반을 매년 할 때마다 느낍니다. ‘하느님은 일하고 계신다.’ 여전히 세상 속에서 당신의 사람을 불러 모으시고 계심을 봅니다. 그러면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새롭게 보내 주신 이들과 함께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지들끼리 잘 놀더라.’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개인화가 ‘게토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려 있어야 하고 끊임없이 나누기를 바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죽지 않고 기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기적은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 마음 단디 묵고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잘하는 사람이 오래 하는 게 아니라, 꾸준히 오래 하는 사람이 잘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