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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가르쳐주는 교리
친구 되어주기


전재현(베네딕도)|신부, 대구대교구청 청소년 담당

마음열기

언제부터인가 대구시에서는 담장허물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행정기관을 비롯하여 공원과 병원, 학교, 성당 및 가정주택에 이르기까지 담장을 헐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공공기관의 높은 담장이 헐리고, 그곳에 녹색 공원이 들어섬으로써 주민들의 만남과 휴식의 공간이 자리잡게 되었다니 반가운 소식입니다. 옆집 담장이 우리집 담장과 함께 사라지고, 이웃과의 거리가 좁혀진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에게도 허물어야 할 담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십대 소년 소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쌓아가고 있는 마음의 담장이 있음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부모님이 그 담장 허물기를 도와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담을 쌓고 살아온 것 같이 우리 아이들도 친구를 대할 때 어느 정도의 담을 확보해야만 안심할 수 있는가 봅니다. 담을 허물면 시야가 트여서 좋고 이웃 간에 좀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처럼, 친구를 대할 때에도 담을 헐면 남을 받아들이고 서로 더 잘 이해함으로써 우리 아이들도 자신들의 인격성장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야! 쟤 봐라. 저 애는 어쩌면 저렇게 생겼냐? 네모난 얼굴에다 여드름에 주근깨까지 ….”

 

“아! 난 왜 이렇게 멍청할까! 책읽기도 하나 제대로 못해서 더듬거리고, 남들 다 맞출 수 있는 질문에 대답도 못하고 웃음거리가 되다니… 바보야!”

 

“넌 참 지저분하구나. 매일 입던 옷만 입고 다니고, 다 떨어져가는 운동화에 맨날 얻어먹기만 하니…”

 

아이들은 자기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하고, 옆에 있는 친구를 보며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함으로써 열등감에 시달리고, 한편으로는 자기 나름대로 친구를 판단하여 자기가 형성해 놓은 담 안에서 어느 정도 갇혀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듯 십대 소년 소녀들의 자기인식과 친구 바라보기는 온통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과 친구들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아이들의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화내도록 만들기도 하고 풍부한 잠재력을 발휘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며, 나아가 가족관계에 상처를 입히고 더 깊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방해하기까지 합니다.

 

생각하기

부모님들도 각자 자기 아이가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기를 바라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무리를 짓듯이, 또한 함께 어울리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안다는 말도 있듯이, 자기 아이가 보다 못한 아이와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서에도 친구를 잘 가려 사귀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자기에게 이익이 있을 때에만 우정을 보이고 네가 불행하게 되면 너를 버린다.”(집회 6,8).

“나쁜 친구를 사귀면 품행이 나빠집니다.”(1고린 15,33). 그러나 또 한편으로 성서의 지혜는 부드러운 말과 상냥한 말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과 잘 사귀라고 권고합니다(집회 6,5-6).

주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그렇게 사귄 많은 친구들 가운데 생명의 신비한 약과 같은 성실한 친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집회 6,16)

바울로 사도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리고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로마 12,16)

 

인간적인 지혜와 성서의 지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인간을 근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일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시각을 가지고 친구를 사귄다면, 아마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큰 바탕을 하나 마련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이 하느님의 모상을 간직하고 있는 참으로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란 아이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은 친구를 사귈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공부를 잘 하는지 못하는지, 집이 부자인지 가난한지, 예쁜지 못 생겼는지 등이 기준이 되고 있지나 않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부모님부터 먼저 깊이 알아들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차별없이 똑같이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어린 아이는 누구보다도 먼저 부모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시고는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아끼시고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 꼭 같이 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가 평등한 것입니다.

 

아무도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시어 친구가 되어 주신 예수님을 봅시다. 가난하다고 친구가 없는 사람, 이기적이고 돈밖에 몰라서 친구가 없는 사람, 병이 들어 친구가 없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친구가 많은 사람보다 오히려 아무도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시어 예수님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이자 작달막한 키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던 자캐오(루가 19,1-10 참조)에게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소경(요한 9,1-41 참조)에게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외로웠던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친하게 지내기를 열망했던 예수님과 친구가 된 후에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요? 아마도 너무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친구로 삼으면 자신도 보잘 것 없이 되어버릴까봐 두려워 그들과 친해지는 것을 꺼려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그들을 더욱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실천하기

솔로몬은 잠언에서 “친구란 언제나 사랑해주는 이”(잠언 17,17)라고 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더라도 언제나 신실하게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참다운 친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참된 친구를 정의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친구를 얻으려면 그 자신이 먼저 친구가 되어주어야 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아이들이 그동안 주변의 친구들, 특별히 소극적 또는 부정적으로 대한 친구들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대한 이유가 옳은 판단에서였는지를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앞으로 그들을 만날 때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하나의 구체적인 결심을 할 수 있게 도와 준다면 더욱 좋겠지요.

 

“부드러운 말은 친구를 많이 만들고 상냥한 말은 친구들을 정답게 한다.” (집회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