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신앙 칼럼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


글 정태우 아우구스티노 신부|이곡성당 주임

 

가을은 대체 언제 왔다가 갔는지, 어느새 두꺼운 옷을 꺼낼 때가 되었다. 이제 좀 있으면 또 춥다고 호들갑을 떨겠지만 겨울 날씨가 전혀 춥지 않아서 미적지근한 것도 이상하니까, 제발 견딜 만하게 적당히 추웠으면 좋겠다.

겨울의 대표적인 축일인 성탄절은 좀 춥기도 해야 하겠고 기왕이면 눈도 내려야 그럴싸하게 모양이 난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문화적인 선입견인지도 모르겠다. 예수님께서 나신 유다 베들레헴은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고 눈을 보기란 더욱 어려운 곳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탄절이 겨울인 것은 북반구의 이야기이고, 지구의 남쪽 반은 한여름에 성탄을 맞는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노래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유행을 하는 바람에 다들 눈 내리는 성탄절을 연상하게 된 것은 아닌지? 그러나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마음에 가장 뚜렷하게 와닿는 인상은 추위도 눈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바로 따뜻함이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화롯가에 걸린 양말 그림이 떠올라서 그런 것일까? 산타 할아버지의 털 달린 빨간 옷이 따뜻해 보여서일까? 아닐 것이다. 글쓴이는 우리가 성탄절에 느끼는 따스함의 근원이 상업화한 크리스마스의 이미지가 아니라 성탄의 본래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님이라고 생각한다. 구세주께서는 찬란한 위엄과 영광에 둘러싸여 나타나지 않으시고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우리가 기절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우리가 돌봐 드리고 안아 드릴 수 있도록 일부러 작고 가난하게 되신 아기 하느님, 그 겸손하신 모습에서 얼어붙은 인간들의 마음을 녹이는 온기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하느님이 무서운 분이 아니고 인자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세상은 돈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우주를 다스리는 진짜 힘은 사랑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설득할 수 있겠는가? 전능하신 분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연약한 아기가 되시어 세상에 오시는 것이었다. 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분이 포대기에 싸여 말 여물통에 누워 계신다. 압도하고 군림하는 권력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시는 그 모습이 바로 진정한 왕을 알아보는 표시이다.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0-14)

 

지난 여름 지독하게 더웠던 복수라도 하려는 것인지, 올 겨울은 예년에 비해 꽤 추울 거라는 예보를 들었다. 부디 추위로 고생하는 분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바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따뜻함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우리도 우리 임금님을 본받아 가난과 겸손을 배워야 하겠다. 주님을 닮아 가난하게 된 사람, 겸손한 사람만이 이웃에게 온기를 전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