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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회
성탄의 단상


글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성김대건성당 보좌

 

로마에 살 때 학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늘 한 사제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번은 베드로 광장에서 음식을 나눠 주는 수녀님들을 찾아가 일손을 도왔죠. 꽃동네에서 오신 수녀님 두 분이 인스턴트 음식이 아니라 신선한 이채들을 하나하나 썰어 넣은 죽을 만들어 매주 나눠 주셨습니다. 수녀님들이 머무는 집에 찾아가 이른 오후부터 저녁까지 작업을 하고 광장으로 나가 그 주변에 계시는 노숙인 분들에게 죽을 드립니다. 거의 한나절은 걸려야 할 수 있는 일, 저는 겨우 시간을 내야 할 수 있는 일을 수녀님 두 분이 오랜 시간 생활이 되어 하고 계셨습니다.

 

어둠이 앉은 베드로 광장에는 포근한 주황색 조명이 거대한 성 베드로 대성당을 비춥니다. 광장을 채우던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그제야 거리를 배회하던 분들이 잠을 청하기 위해 광장으로 돌아옵니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겠지요. 그 이야기들을 섣불리 물어보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분들이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면 저는 가만히 듣습니다. 이탈리아어가 짧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몸을 숙이고 귀를 기울입니다. 사람들은 그분들을 더럽고, 위험하고, 쓸모없고, 불쌍한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국에 있을 때 저도 그런 부정적인 인식으로 볼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이방인으로 있으니 그런 부정적인 생각과 시선은 생기지 않았죠. 그저 그분들이 따뜻한 죽 한그릇 먹고 불편한 자리지만 속도 맘도 편안하게 잠을 청하길 바랐습니다.

 

성탄 밤미사를 하려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갔습니다. 가는 길에 광장 근처에서 한 노숙인이 어미 길고양이와 새끼 고양이에게 밥을 먹이면서 고양이 가족이 누울 자리를 마련해 주는 걸 봤습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따뜻해졌죠. 발걸음을 옮겨 전세계에서 온 많은 사제들과 신자들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님과 함께 봉헌하는 미사에 참례 했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에서 사제들은 금실로 수놓은 제의를 입고, 사람들은 정장을 차려입고 따뜻하게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강론에는 예수님의 구유와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자는 내용이 선포되었죠. 그런데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에서 꿈에 그리던 교황님과 함께한 완벽한 전례였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죠.

 

오히려 저는 여러 가지 사연으로 버려지고 도망친 사람들이 잠을 청하는 거리에서, 그들의 허기를 달래고 마음을 들어주는 수녀님들의 발걸음과 손길에서, 길고양이 가족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떠올렸죠.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 그의 어머니는 머물 자리가 없어 마구간에 몸을 풀었고, 구유가 하느님 아들의 요람이 되었다는 것, 곧 아이를 낳으려는 여인에게 따뜻한 방을 잠시도 내어 주지 못하는 세상,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모였다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날 밤 벌어진 사건, 돈과 계약의 논리에 철저히 잊혀진 한 가족의 딱한 사정, 그날 성탄의 이야기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라 거리에 있었습니다.

 

12월 예수 성탄의 민낯을 기억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의 기쁨을 축하하며 선물을 나누며 먹고 마십니다. 기쁨을 나누고 축하하는 건 좋은 일입니다만 의미가 사라진 축하와 기쁨은 형식만 남습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에 해야 할 일과 행사는 다 끝냈지만, 그 후에 찾아오는 피로와 공허감이 형식만 남은 성탄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 줍니다. 많은 이들에게 크리스마스라는 사건이 누군가에 의해 소비하는 문화가 되고 만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거리를 걸으며 떠올립니다. 밤거리를 추위와 굶주림으로 배회하던 길고양이 가족과 노숙인들을,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수녀님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을 떠올리며 저는 추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따뜻한 방 안에서 두 손을 모읍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버려지고 도망친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위해, 갖가지 성탄 행사로 분주할 사제들과 수도자들, 본당의 청년들과 교우 분들을 위해, 불안하고 열악한 삶의 조건 안에서 버티고 견뎌야만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모은 두 손이 그들에게 잠깐이나마 위로가 되고 온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교회가 교회법과 교의와 전례로 거룩함을 지키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버려지고 더럽혀지기를, 그래서 우리에게 오는 아기 예수의 마음을 깊이 닮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단순한 즐거움과 행사의 기쁨이 아니라 물질이 없어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이 없어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한번 더 눈길을 주는 그런 성탄이 되기를 두 손 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