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대구가르멜수녀원에서 음악피정을 함께했습니다. 수녀원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시작이었습니다. “신부님, 〈빛〉 잡지 잘 보고 있습니다. 저희도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갑자기 군대 생각이 났습니다. 당시 글을 읽고 싶은데 읽을 수 있는 글이라고는 국방 일보와 가롤릭신문뿐이었습니다. 세상과 연결된 길이 그것뿐이기에 너무나 소중한 통로였습니다. 〈빛〉 잡지가 누군가에게, 특히 주님께 봉헌된 귀한 봉쇄수녀원 수녀님들께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중한 가치의 자리를 지키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수녀님들께 젊은이들의 어떤 이야기를 들려 드릴 수 있을까? 세상에서 어른들이 구분하기 좋게 만들어 놓은 세대를 지칭하는 ‘MZ’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요즘 젊은이’들이 어떻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의 끝은 이랬습니다. 다름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같음을 찾아보는 것. 그들 역시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우리와 한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소통하고 싶어 하는 어른이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사랑’인 듯했습니다.
2년을 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친한 친구들이 이제 졸업을 준비합니다. “뭐 할 거야?”, “대학원 준비하려고요.”, “3월, 8월에 국가고시 있어서 준비해야죠”, “자격증 나오면 취업하려고요.”, “취업해야죠.”, “워홀 가 보려고요.”, “잘 모르겠어요.”… 학생이라는 이름을 떼고 살아보는 그 시작, 얼마나 두렵고 어색할까? 너무 많은 길이 있기에 확신이 서지 않는 미래에 몸을 내어 던지는 젊은이들을 세상에 보내며 그들을 응원하고 기대하는 마음 전합니다. 굳이 나이 먹고 나서 알게 되는 것들을 그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 모든 게 인생인데 그들도 겪고 나면 자신들의 시간을 먼저 살아온 우리를 이해하고 다시 보게 되겠지요. 다만 우리는 우리의 숙제를 잘해 나가는 것, 먼저 잘 살아 내는 것이 가장 큰 ‘유산’이고 ‘가르침’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너무 다양한 학생들과 살다 보면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 장면도 많이 보게 됩니다. 여기는‘ 학교’고 그래도 ‘선생’인데 못 본 척, 매번 넘어갈 수는 없으니 잔소리도 가끔은 해야 됩니다. - 물론 잔소리도 유니크하고 힙해야 먹힙니다. - “그래, 이해는 되는데 용서가 안 된다.”, “개념은 만들어 줄 수 있는데 4가지는 답이 없다.” 학생들과 농담처럼 잔소리하기 전에 건네는 말입니다. 반대로 너무 잘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참~할 수가 있지?’ 기가 막히는 친구들이 한 번씩 등장합니다. “신부님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아니다. 너희들이 힘들었지”, “아니에요. 저희는 신부님들이 다 준비해 주신 곳에서 재미있게 참여만 하면 되는 걸요.”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이 말을 20살 1학년 학생이 먼저 건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너무 이쁘고 고마웠습니다. 한 번씩 이런 생각도 듭니다. 개념 없고 4가지 없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 적은 이 젊은이들이 모두가 너무 예의 바르고 다들 눈치 빠르고 획일화된 행동을 하면 너무 무섭지 않을까? 젊은이들에게 변화와 성장의 시간을 기다려 주는 것 또한 교육의 한 장면이 아닐까? 학기초 소형섭 신부님이 전체 교수회의 때 강의하셨던 “‘가장 가까운 어른’이 교수님들이십니다.”라는 말씀이 이런 맥락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도 학교 정문 앞에는 사이비 종교들이 학생들의 개인정보를 가져가기 위해서 진을 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집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하고 있지?’ 확실히 우리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자신감도 없습니다. 확신도 없고요. 그냥 ‘다정한 무관심, 이 보편적인 상태라고 보입니다. 물론 저는 ‘다정한 무관심’은 사랑의 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열정, 비전, 능동과 같은 에너지는 어느새 우리 교회 안에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늙어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요리 프로그램을 봐도, 노래하는 연예 프로그램을 봐도 우리는 비평하고 비판하는 데는 이미 전문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플레이어는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비평과 비판에서 머물지 않고 직접 요리를 해 보고 노래 연습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시대의 문제는 해결되고 발전하고 안정화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변화하려면 자신의 삶의 절반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20살 학생들에게는 10년의 시간이 필요하고 60살의 사람에게는 30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변화와 도전은 젊은이의 특권이고 노년의 삶에게 그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또 이 말은 젊은이들이 우리를 밟고 그만큼 더 멀리 더 앞서 갈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2000년 된 그리스도교는, 우리 천주교는, 이들 앞에서 어떤 시간을 살고 있을까? 현 시점에서 20대 젊은이들을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이 대학이라는 현장을 우리 교회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가난하고, 약하고 순수한 시절을 살고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만큼 간절하게 이 선교의 장을 보고 있을까? 확실한 것은 대학의 학생들은 가르치는 ‘교수 신부’보다 ‘함께 살아 줄 사목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대안이 있지만 함께 살아 줄 수 있는 건 ‘사목자’ 밖에 없으니까요.
“젊은이들에게 물어보세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원하는지” 저는 이 질문이 세상에서 제일 답답한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말 아는 젊은이들은 일단 우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게 인간인데, 그저 어른들이 자기 책임을 젊은이들에게 전가하려는 좋은 배려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실제로 그것을 이야기해도 들어주지 않았던 적이 많아서 더이상 그 질문을 젊은이들에게 던지기도 민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살아서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모습이 매력적이면 함께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반대라면 우리는 ‘흩어 버리는자’(루카 11,23)가 될 것입니다.
어느새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제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시절 푸른 젊은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를 1년간 담아 보았습니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사는 이들과 2년을 살다 보니 ‘젊음을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도 있었던 시간, 그 시간을 다시 선물해 준 우리 학생 친구들, 함께 살면서 서로를 견뎌 준 우리 신부님들, 수녀님들, 자매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이 지면을 통해 전합니다. 그리고 귀한 시간 글 읽어 주신 교우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젊음에 대한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의 젊음에 평화를 빕니다.
* 그동안 ‘시절 푸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연재를 맡아 주신 황영삼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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