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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복음 묵상
매일 복음 묵상


유스티노 성서 모임 활동 사제들

* 이번 호부터 유스티노 성서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제들이 함께하는 매일 복음 묵상이 연재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2월 1일(일) 대림 제1주일
루카 21,25-28.34-36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21장 25-28절, 34-36절을 큰소리로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25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사람의 아들이 오기 전 나타나는 현상들은 무엇입니까?(25-26절)

- 사람의 아들은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까?(27절)

- 사람의 아들이 왔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28-36절)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 말씀길잡이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

저는 타인의 눈치를 자주 봅니다. 그들이 기뻐하면 ‘아, 내가 잘하고 있구나.’ 생각하고 그렇지 못하면 밤잠을 설치며 이유를 찾습니다. 이런 저에게 동기 신부들은 인정 욕구가 많아서 그런 거라고 충고해 줍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도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타인의 눈치를 보는 근본 원인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해서’입니다. 믿지 못하기에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타인의 반응을 통해 잘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려 합니다. 선택도 잘 못합니다.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을 타인에게 미룹니다.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 중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아마도 현재 내가 가지지 못한 것, 하지만 너무나 갖기를 갈망하는 것이 이 구절의 정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로 ‘나 자신을 믿는 힘’입니다. 스스로를 믿는 사람은 모든 행동에 당당합니다. 타인의 충고도 상처받지 않고 잘 받아들입니다. 나에겐 없는 모습입니다.

스스로를 믿는 힘을 갖고 싶습니다. 매 순간 좀 더 당당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예수님 앞에도 당당하고 기쁘게 서고 싶습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 여러분은 가지고 계신가요?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1) 다음 질문 안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봅시다. 그중 한가지를 선택해서 공동체와 함께 나누어 봅시다.

① 가장 마음에 와닿은 말씀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나에겐 자신을 믿는 힘이 있는지 나누어 주세요.

③ 당당하게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2) 우리 공동체가 한 주(달) 동안 함께 노력해 볼 실천사항을 정해 봅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공동체에 맞는 기도나 성가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바칩니다.

 

 

 

12월 2일(월) 대림 제1주간 월요일

마태 8,5-11 :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백인대장은 군인이었다. 위로는 상관의 명령을 따르고 아래로는 100명 가량 되는 부하를 거느린 입장에서, 그는 자기 정체성과 권한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그는 예수님께서 지니신 힘과 권한을 바라볼 때도 명령 체계 안에 놓인 군인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고,(9절 참조) 그 체계 안에서 구원이라고 하는 목적이 잘 이루어지길 바랐다. 백인대장의 이러한 이해가 꽤 투박하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의 믿음까지 거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자기 피부에 가장 와닿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권한과 활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제 이웃인 종을 살릴 수 있는 상급자 예수님의 명령 한마디를 바라면서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신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백인대장은 다른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통해, 형제를 위해 예수님께 간청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어떤가. 마침 우리는 미사 중 성체를 바라보며 백인대장이 남겼던 말들을 반복한다. 반복되는 것이 그가 남긴 말마디만이 아니길 소망한다. 나는 어떻게, 나의 자리에서 빚어낸 나의 신앙을 예수님께 고백하고 있는가?

 

 

 

12월 3일(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루카 10,21-24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철부지 아이들은 부모님의 말과 행동을 보고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고 하지요. 엄마 아빠가 자주 싸우고 서로 거친 말을 주고 받으면 아이들은 그것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엄마 아빠가 화가 날 때 쓰는 말이니까, 뜻은 몰라도 나도 화가 나면 이 말을 써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들었고 알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고 있지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늘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행복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루 동안 하는 말들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일으켜 세우는 말, 사랑의 말, 희망의 말을 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흉을 보고, 내 감정대로 거친 말을 내뱉으십니까. 다른 사람의 좋은 모습과 장점을 바라보십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고 흉을 보고 판단하십니까?

 

 

 

12월 4일(수)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마태 15,29-37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공관복음에 모두 나오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이다. 복음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군중을 먹이시는 오병이어의 기적(마르 6,30-44; 마태 14,13-31, 루카 9,10-17; 요한 6,1-14)을 먼저 전하는데,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는 빵이 다섯 개가 아니라 일곱 개다. 다섯 개든, 일곱 개든 굶주린 군중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많은 이가 이 기적을 나눔의 기적으로 해석한다. 모두가 각자 먹을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문득 나눌 마음이 들어 아끼지 않고 나눴더니, 넉넉히 먹고도 남더라는 말이다. 언뜻 보면 아름다운 해석이지만, 이 해석이 지닌 위험성도 다분하다. 모든 기적 이야기를 윤리적 교훈에 맞춰 해석할 위험 말이다. 근래에 나온 탈신화(Entmythologisierung)적인 성서해석이 인간 이성에 부담을 주지 않아 많은 이의 환영을 받긴 했지만, 신앙을 윤리적 차원으로 환원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모든 기적 이야기를 윤리적으로 해석한다면, 성경은 고만고만한 도덕책이 되고 만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윤리적으로 해석해서 어떻게 할 텐가? 육화의 신비와 부활의 신비도 그렇게 할 텐가? 오늘 복음의 기적은 기적으로 보면 된다. 기적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권능과 사랑을 묵상하면 된다. 세상을 열고 닫으시는 하느님께 빵을 많게 하시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12월 5일(목)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마태 7,21.24-27“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마태 7,21)

 

‘주님’을 부르고 ‘말씀’을 듣는 것이 개인의 성숙이나 영적 깨달음으로 치부해 자신의 삶을 가꾸는 것으로 이해해 버리면 오늘 복음은 너무나 진부한 말씀이 되어 버린다. 주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아직 반쪽의 일이고 남아 있는 반쪽은 실천의 자리에서 고민해 보아야 한다.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 오늘 복음은 이 질문을 집 짓는 일에 빗대어 설명한다. 폭풍에 견디는 튼튼한 집은 잠언 10,25의 영향인 듯싶다. “폭풍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토대 위에 서 있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이 의로운 삶을 지향하는 것이라 가정할 수 있겠는데 ‘어떤 실천’은 ‘의로움이 무엇인가’로 다시 묻게 된다. 마태오 복음은 율법 학자들 보다 더 큰 의로움을 황금률로 정리한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남’이라고 번역된 그리스말은 ‘인간’을 가리키는 ‘안트로포스’다. 신약 성경은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이 말마디를 육체적 나약함과 한계, 그리고 죽음에 짓눌린 인간의 슬픈 현실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간은 인간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홀로 생존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 생존하기 위한 외로운 투쟁이 아니라 함께 보듬고 위로하기 위해 인간은 삶을, 생명을 고민하고 설계한다. 인간인 우리는 서로를 부르는 일로 주님을 부르고 그것으로 ‘공동의 집’을 바위 위에 지어 간다. 하늘 나라는 그렇게 커지고 튼튼해진다.

 

 

 

12월 6일(금)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마태 9,27-3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눈먼 사람 둘’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 간청하지만, 예수님은 그 부탁을 즉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집안에 들어가시고, 그들은 그분께 계속 다가갑니다. 눈이 먼 사람에게 공간이 변하고 계속 움직여야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궁금해집니다.

석연치 않은 점은 또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나서실 때는 언제나 군중이 따라다녔습니다.(마태 9,33 참조) 눈먼 사람들은 오로지 소리에만 기대어 걸음 할 수 있었겠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끄러운 와중이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과 눈먼 이들의 만남 사이에는, 많은 사람들의 침묵이라는 배려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단지 그들만의 믿음이 아닌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들의 외침과 신앙고백이 예수님께 가닿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침묵 때문에 가능했으니까요.

사람들이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함구할 것을 단단히 이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을 신앙에로 이끄는 것은 성급한 외침인가요 사려 깊은 침묵인가요. 사람들의 신앙을 돕는 것은 정말 무엇일까요. 나지막이 질문해 봅니다.

 

 

 

12월 7일(토)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마태 9,35—10,1.6-8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면 가끔은 그냥 혼자서 모든 일을 하는 게 차라리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경험이 많이 없다거나 미숙한 사람, 그래서 무슨 일을 맡기기가 불안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함께하지 않고 혼자서 일을 다 처리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오히려 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도와가면서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하는 우리네 삶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일을 하기에 조금은 미숙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기회를 주고 지켜봐 주면서 조금씩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올바른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 역시 혼자서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은 당신의 복음 사업을 위해 항상 우리의 손길,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뭐 그리 잘나고 뛰어나서는 아닐 겁니다. 오히려 그분이 보시기에 당시의 제자들, 그리고 오늘날의 당신 교회의 일꾼들을 보고 계시면 “아, 차라리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해 버릴까…” 라는 답답한 마음이 드시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시는 이유는 우리들 역시 성장해 나가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일 겁니다. 비록 미숙하고 부족한 우리 모두이지만, 그분의 보살핌을 믿으며 그분의 일에 하루하루 동참해 나갔으면 합니다.

 

 

 

12월 8일(일) 대림 제2주일

루카 3,1-6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3장 1-6절을 큰소리로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0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0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0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04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0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0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하느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내렸나요?(2절)

- 요한이 모든 지방을 다니며 선포한 내용은 무엇인가요?(3절)

- 이사야 예언자가 요한에 대해 했던 예언은 무엇인가요?(4-6절)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 말씀길잡이

<자랑>

자식 자랑을 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이 사제이기 때문에 본당에서 더욱 침묵하고 조용히 지내셔야 한다고 늘 말씀드리지만 가끔 그게 잘 안되시는 것 같습니다. 한 번씩 본인도 모르는 새 아들 자랑을 합니다. 옆에 서있던 제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고 나서야 아차 싶어 말씀을 그만두십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그렇지 않다며 이번에 실수한 거라며 저에게 해명을 하십니다. 아무래도 저는 어머니에게만은 숨기기 힘든 자랑스러운 아들인 것 같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모습도 우리 어머니 같습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게 골짜기는 메우고 높은 산과 언덕들은 낮게 합니다. 굽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만들어 예수님이 편히 걸으실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뵙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아무래도 요한에게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알리고 싶은 자랑스러운 분이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이십니까? 얼마나 자주 예수님을 자랑했나요. 혹 가톨릭 신자임을 숨기고자 했던 적은 없었나요? 이 물음을 통해 한번 더 나의 신앙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1) 다음 질문 안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봅시다. 그중 한가지를 선택해서 공동체와 함께 나누어 봅시다.

① 가장 마음에 와닿은 말씀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예수님을 자랑한 적이 있습니까?

③ 가톨릭 신자임을 숨긴 적이 있습니까?

2) 우리 공동체가 한 주(달) 동안 함께 노력해 볼 실천사항을 정해 봅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공동체에 맞는 기도나 성가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바칩니다.

 

 

 

12월 9일(월)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에서 옮김)

루카 1,26-38“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천상의 당신 자리를 떠나, 이 세상 속으로 뛰어드신 사건이다. 구유에 누운 아기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우리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들에 대한 포기가 있었을 테다. 내려놓고 온 전부가 하느님 한 분만의 전유물로 남지 않고, 모든 창조 세계를 향해 열리기를 바라면서 결단하신 사랑이 ‘성탄’이라는 두 글자에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성탄의 시작점인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가 내린 결정은 하느님의 그것과 닮았다. 동의의 말과 함께 마리아 또한 지금껏 자기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로부터 떠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내어 준 자리를 통해 모든 사람의 복이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그 떠남이 쉽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아이를 잉태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질 위험을 마리아가 몰랐겠는가.(그녀는 ‘곰곰이’ 생각했다!) 어려운 결단이었지만 마리아는 주인이 좋은 것을 주실 분임을 믿었고, 주인이 계획하는 좋은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쪽으로 뛰어들었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마리아에게 그러했듯, 우리 각자에게도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순간이 있을 터이고, 또 그 어려움에 고민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성탄이 매일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우리 또한 우리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세상에 모시는 또 하나의 마리아가 되어야 한다. 과연 그럴 때, 나는 마리아가 했던 것처럼 선하신 주인을 믿고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는가?

 

 

 

12월 10일(화)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마태 18,12-14“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오늘 복음의 핵심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하느님의 관심은 작은 이들, 소외 받는 이들 한 명 한 명에 있습니다. 아무리 경제 지수가 올라가더라도, 아무리 대기업의 매출 성장이 좋더라도, 노숙자가 거리에서 죽는 사회를 하느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잘 사는 사람이 더 좋은 차를 바꾸는 것에 하느님은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니라 폐지 줍는 어르신 한 분의 손수레에 더욱 눈길을 주고 계십니다. 상점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기보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의 힘없는 요청에 더 귀 기울이십니다. 감옥에 갇혀 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수용자들, 아프지만 치료비와 입원비가 없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 전쟁을 피해서 혹은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왔지만, 피부색이 다르다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차별받는 이주민들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고, 거기서 다치는 노동자들을 보고 가슴 아파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탄생을 준비하고 있는 이 기간에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눈이 되어서, 그들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며, 하느님의 손과 발로 찾아가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소외된 이웃과 함께 와 계십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 그분을 우리의 소외된 이웃 안에서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2월 11일(수)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마태 11,28-30“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멍에’(쥐고스)는 구약 전통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상이다. 멍에는 짐승을 부리는 도구인데,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즐겨 쓴다. 오늘 복음은 집회서 51장의 말씀과도 많이 닮았다. “너희 목에 멍에를 씌우고 너희 영혼이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여라. 그것은 곁에 있어 찾기 쉽다. 나 자신이 얼마나 적은 노력을 기울여 큰 안식을 얻게 되었는지 너희 눈으로 보아라.”(집회 51,26-27)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가르침을 훨씬 넘어선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시는 초대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오라.” 하시고, “나에게서 배워라.” 하신다.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는게 아니다. 규정을 지켜 구원 받는 게 아니다. 예수님의 마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없이, 규정을 잘 지키고 열심을 다 한다고, 그것이 무슨 덕이 되겠는가? 규정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은 규정의 노예일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의 길, 해방의 길로 초대하신다. 우리를 영원한 안식의 길로 인도하신다. 규정만 봐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께 배워야 한다.

 

 

 

12월 12일(목)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마태 11,11-15“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12)

 

세례자 요한은 유다 서민들에게 칭송을 받은 인물이다. 메시아 시대를 알리는 참된 예언자, 나아가 메시아 자체로 인식될 정도로 요한에 대한 신뢰는 두터웠다. 그럼에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로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는 마태오 복음의 의도는 무엇일까. 아마도 하늘 나라는 사회적 권력도, 개인의 능력도 아닌 서로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세상이기 때문 아닐까. 사랑 앞에 사람은 차별이 없고 구별이 없다. 사랑은 초월적이며 무한하다.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하는 이유는 사랑보다는 소유욕으로, 사랑보다는 인정구걸에 탐닉하는 우리 탓이 아닐까. 마태오 복음은 진심을 다해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촉구한다.

그럼에도 사랑이 무엇일까, 묻는, 꽤나 상투적인 질문에 우린 선뜻 답하질 못한다. 19세기 프랑스 문인 보들레르는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복음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교회의 목소리를 듣고,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그래서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부족하고 편협한지 되돌아보는 일, 그게 사랑이다. 내가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나를 무한히 끌고 가도록 여전히 배울 게 너무 많은 사람이라 스스로 고백하는 일, 그게 하늘 나라에 살아가는 이의 태도다.

 

 

 

12월 13일(금)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마태 11,16-19“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출근길에 길을 건너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건널목 앞에서 차를 멈추고 기다리는데, 아이는 저를 빤히 보며 천천히 걷고 있었습니다. 제 뒤에 기다리는 차는 늘어났지요. 아이는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점점 더 느리게 걸었습니다. 아이는 교통법에 의지하여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제 기다림을 강제했습니다. 일종의 놀이였던 셈이지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아이는 권력자였습니다. 그런 놀이는 누가 가르쳐 주었던 걸까요. 본능이라면 소름 끼치는 일이고, 어른들에게 보고 배웠다면 서글픈 일이겠지요.

아이들의 모습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의 거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쪽에서는 피리를 불고, 한쪽에서는 곡을 합니다. 왜 피리를 부는지, 왜 곡을 하는지. 가르쳐 주는 어른들은 없었을까요. 아니, 가르쳐 줄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이유를 묻지 않는 이들, 사람의 아들이 먹고 마시며 죄인들과 어울리는 이유를 따지지 않는 이들이었으니까요. 누군가의 행동을 비난하기보다 먼저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었다면 아이들이 어떠했을까요.

말씀 앞에서 조용히 다짐합니다. 누군가 피리를 불 때, 춤을 추지는 못해도 함께 흥얼거릴 줄 아는 사람, 누군가 곡을 할 때 잠시 멈추어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 누군가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 저부터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2월 14일(토)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마태 17,10-13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을 보고 듣게 됩니다. 그렇지만 보고 듣는 수많은 감각 정보들을 모두 인지하거나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 혹은 관심있는 것들로만 걸러서 인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차를 타고 길을 가면서 똑같은 광경을 보게 되더라도 자신이 평소 늘 생각하고 관심 있었던 것이 눈에 더 들어오고 또 기억하게 된다는 겁니다. 꽃에 관심 있는 사람은 길에 핀 꽃을 더 잘 기억하게 될 겁니다. 돈에 관심이 많던 사람이라면 은행이나 증권회사 간판이 더 눈에 들어오게 될 겁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보는 대로 믿는다기 보다는 믿는 대로, 혹은 생각하는 대로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회개를 외치며 예수님의 길을 미리 닦아 놓은 인물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이 바라는, 자기들의 구미에 맞는 예언자의 모습이 아니었나 봅니다. 아니면 예언자 혹은 메시아에 대한 관심 자체가 평소에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나 자신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열망하며 살아가는가? 그렇게 우리는 바라고 열망하는 것을 더 잘 발견하고 또 마주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12월 15일(일) 대림 제3주일

루카 3,10-18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3장 10-18절을 큰소리로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10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요한이 군중과 세리, 군사들에게 한 말은 무엇입니까?(11-14절)

- 백성들이 요한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대는 무엇입니까?(15절)

- 요한이 전한 메시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16-17절)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 말씀길잡이

<내 모습 그대로의 삶>

욕심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분수(分數)에 넘치게 무엇을 탐하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기준이 ‘분수’, 즉 “내 모습 그대로”입니다. 문제는 사람마다 분수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비교하고 질투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욕심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다들 이렇게 산다는 말로 죄책감을 지워 버립니다.

각자 하는 일에 따라 분수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리의 분수가 있고 군사의 분수가 있습니다. 세리에게 백성을 지킬 힘이 없듯이 군사도 계산하고 공평하게 징수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각자의 분수를 무시한 채 욕심을 부리게 되면 폭력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도 회개를 위해 가장 먼저 자신의 분수에 맞게 살아갈 것을 이야기합니다.

곧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내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오로지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욕심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 자신을 인정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 모습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1) 다음 질문 안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봅시다. 그중 한가지를 선택해서 공동체와 함께 나누어 봅시다.

① 가장 마음에 와닿은 말씀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다른 사람에게 지기 싫어서 욕심을 부린 적이 있습니까?

③ 내 모습대로 살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2) 우리 공동체가 한 주(달) 동안 함께 노력해 볼 실천사항을 정해 봅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공동체에 맞는 기도나 성가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바칩니다.

 

 

 

12월 I6일(월)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마태 21,23-27“모르겠소.” …

 

“모르겠소.”라는 수석 사제들의 답변에서 알고 모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저 말은 식별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처세술의 문제고, 눈앞에 닥친 불리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방패막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질문이 요한의 세례와 회개에 관한 것이라면, 사실 이는 유다 사회의 제관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도 중요한 주제다. 하지만 수석 사제들은 개의치 않는다. 이미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체계를 유지하는 것, 그것 하나이기 때문이다. 내게 익숙하고 옳은 것들만을 보고, 정형화된 말들로만 생각하고 소통할 때 사람의 시야는 얼마나 좁아지던가.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모르겠소”의 처세술에서 우리 또한 마냥 안전한 것은 아니다. 복잡한 것들, 골치 아픈 주제들 앞에서 “모르는 일”이라며 일관하면 ‘고상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될 수 없다. 공동체의 허점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돌린다면, 성가신 일에 휘말리지 않는 ‘깨끗한’ 사람일지언정 함께하는 사람일 수는 없다. 하지만 기억하자. 우리 신앙인은 고상하고 깨끗한 이들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라면 여기저기 다니면서 흙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는 이들임을. 그 사실을 알고 내 옆의 아픈 이를 위해 손을 뻗을 준비 정도는 되어야, 주님께서 지니신 권한이 무엇인지 들어 이해할 정도가 된다는 것을.

 

 

 

12월 17일(화)

마태 1,1-17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누구나 족보 안에 기록된 조상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분이길 기대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길 소망합니다. 족보에 친일파나 대역죄인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는 않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족보 안에 기록된 많은 인물들 가운데에도 결점과 허물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죠.

예수님의 족보 역시 천사들의 족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낳고 낳음을 거듭하며 역사를 이어가는 인간들은 언제나 진흙탕에 뒹구는 인간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얼룩지고 상처 받은 인간들의 자손으로 이 땅에 태어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잘 아십니다. 우리의 잘못과 허물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죠. 우리의 잘못과 허물, 나약함과 부족함을 바라보고 그것마저도 하느님께 봉헌한다면 주님께서 필요한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우리가 아무리 부끄러운 생활을 한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 구원사업을 계속해 나가십니다. 언제나 부족하고 잘못을 저지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예수님을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12월 18일(수)

마태 1,18-24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말한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이사야서에 나오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라는 말씀 그대로다. 임마누엘은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임마누엘이라는 말보다 성탄의 신비를 더 잘 드러내는 말이 있을까? 예수님의 육화는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한 육화이다.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우리가 사는 이 땅,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다. 독일의 신학자 그레샤케는 성탄이 주는 희망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 당신이 품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이 아무리 흉해도, 그것이 아무리 타락하고 망가졌더라도 기꺼이 당신 품에 안으십니다. 바로 여기에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품어 주신다는 희망, 여기에는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희망입니다.”(『낮은 곳에 계신 주님』, G. 그레샤케, 62쪽)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시어, 가장 비천한 것까지 품으시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느님의 육화는 우리에게 하나의 도전이 된다. 하느님이 조건 없이 품으시는 사람을 우리도 품을 수 있는가? 우리도 사람을 품으러 낮은 곳으로 갈 수 있는가?

 

 

 

12월 19일(목)

루카 1,5-25“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루카 1,16)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일까. 오늘 복음에 ‘돌아오게 하다’로 번역된 그리스말 동사는 ‘에피스트레포’이다. 무언가를 굽히고 조종하고 바꾸는 변화를 가리키는 동사다. 이스라엘 백성이 삶의 자세를 바꾸어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세례자 요한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 하느님을 향한다는 건, 실은 제 삶을 바꾸고 고치고 돌아서야 하는 것이 전제된다. 무엇이 부족한지, 어떤 것을 고쳐야 할지 우리는 알다가도 모를 순간을 접한다. 그리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의 관습적 삶에 의지한다. 묵주 기도를 하고, 성지 순례를 하고, 각종 신심 활동을 하고…. 그러나 우리 삶은 고만고만 변한 게 없이 흘러가곤 한다.

하느님께 돌아서는 건, 돌아서야 할 명분이나 돌아설 수 있는 거창한 작업거리가 필요한 일이 아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 주위에 무심코 흘러 보내는 일들, 그리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들을 다시 꼼꼼히 챙기는 것이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는 일이 아닐까. 거창한 신앙 생활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 그래서 2000년 전 십자가의 형벌에 무심코 내어 던져 버린 예수님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일, 그것이 하느님을 향해 제대로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주님은 우리 노력의 끝자락에 선물을 들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기대치 않은, 바라지 않은 일들 안에서 우리를 내려 놓을 때, 기어이 우리와 하나가 되시는 문이시니까. 마치 세례자 요한의 탄생처럼….

 

 

 

12월 20일(금)

루카 1,26-38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오늘 복음은 성모영보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일화를 ‘아눈시아시오(annunciatio)’라고 부르는데요. 이 말은 ‘알리다’는 뜻의 ‘아눈시오(annutio)’에서 나온 말입니다. (여성 세례명 ‘아눈시아따’는 바로 성모영보의 의미를 담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히 어떤 결정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알림’ 만큼이나 ‘받아들임’이 중요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끝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한편으로 ‘알림’과 ‘받아들임’ 사이에도 ‘과정’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에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놀라다는 말은 ‘디아타라소’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마음이 산란해지다.’(요한 14,1 참조)라고 번역되어 있지요. 깊은 근심을 뜻하는 말입니다. 생각하다는 말은 ‘디알로기조마이’입니다. 이 말을 풀어보면 ‘내적으로 논쟁하다’ 정도가 됩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한 신앙인이 응답하는 데까지는, 깊은 근심과 내적 갈등이 따르는가 봅니다.

 

 

 

12월 21일(토)

루카 1,39-45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오늘 복음 말씀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뒤에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고 있던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이야기입니다. 두 분께서 만나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동병상련, 혹은 이심전심이라는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요셉과의 혼인 이전에 아이를 가지게 된 성모님이나 매우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진 엘리사벳이나 여러모로 말 못할 걱정과 아픔이 많았을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태중의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역시 비슷한 운명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온 인류의 메시아로서 복음을 선포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운명, 그리고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운명이 서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그 애틋한 마음이 즐거워 뛰놀았다는 모습으로 표현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흔히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상황이나 아픔은 내가 비슷한 처지에 놓여 보았을 때 더 잘 이해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잘 공감해 줄 수 있고 또 위로해 줄 수 있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의 근심과 아픔이 타인을 위로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처럼, 그리고 태중의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들 역시 저마다의 굴곡진 경험들을 승화시키면서 서로를 좀 더 이해하고 위로하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12월 22일(일) 대림 제4주일

루카 1,39-45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1장 39-45절을 큰소리로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마리아가 찾아간 곳은 어디입니까?(39-40절)

-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은 엘리사벳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41절)

-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한 말은 무엇입니까?(42-45절)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 말씀길잡이

<모기 목소리>

중국 북경에서 사목할 때의 일입니다. 저는 목소리가 가늘고 가볍습니다. 처음엔 목소리가 깨끗하니까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곳 주일학교 학생들이 단점이라고 못 박아 주었습니다. 심지어 미사 중에 제 목소리를 흉내내고 놀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리실 천장에 불이 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학생들이 교리 수업 중이었는데 천장에서 ‘펑’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천장 판넬을 뜯고 안쪽을 보니 불길이 솟고 있었습니다. 급하게 소화기로 껐지만 검은 연기가 전 층을 덮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을 안심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기차놀이를 하자며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건물을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다행히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몇몇 아이들이 저에게 와서 ‘펑’ 소리에 무서웠는데 신부님 목소리가 들려서 무섭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제 목소리가 너무 듣기 좋다고 칭찬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목소리 좋은 신부가 되었습니다. 중저음의 무게감 있는 목소리는 아니지만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목소리를 가진 신부가 되었습니다.

오늘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목소리에 행복해 합니다. 태중의 요한까지도 말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목소리에 행복해 하시나요? 그리고 그 목소리를 얼마나 자주 들으면서 살아 가시나요?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1) 다음 질문 안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봅시다. 그중 한가지를 선택해서 공동체와 함께 나누어 봅시다.

① 가장 마음에 와닿은 말씀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목소리가 있나요?

③ 힘든 순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 받은 적이 있나요?

2) 우리 공동체가 한 주(달) 동안 함께 노력해 볼 실천사항을 정해 봅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공동체에 맞는 기도나 성가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바칩니다.

 

 

 

12월 23일(월)

루카 1,57-66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할례식을 축하하러 온 이들에게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단호함이 퍽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본문에도 드러나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집안에 전해지는 이름 가운데 하나를 따서 아이에게 붙여 주곤 하였다.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기존 가족 구성원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가족의 신앙과 명맥을 이어 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그러한 전통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였다. 하느님의 뜻이다. 이미 탄생 예고 때 가브리엘이 찾아와 제시한 요한이라는 이름이 있었고(루카 1,13 참조) 아기는 장차 이 이름을 가지고 광야로 나아가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야기하였다. “안 됩니다.” 이 말은 듣는 이들에게 단호했겠으나, 말하는 부모 본인에게는 아팠을 게다. 몸에 익은 전통, 자녀를 통해 영광을 얻고픈 마음, 오랜 세월 아이를 바라며 꿈꾸었던 일상을 봉헌하는 한마디였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단호함 또한 주어진 사명으로 생각했고, 그것을 허락하신 하느님을 찬미할 줄 알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 또한, 각자의 기대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그 모든 기대를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적어도 필요한 때가 되었을 때 신앙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위해 필요한 단호함만큼은 계속 청할 수 있길 바란다. ‘내 삶은 이것이어야만 해’, ‘나는 이 방향으로만 가야 해’라는 기대를 내려놓은 자리에, 틀림없이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니.

 

 

 

12월 24일(화)

루카 1,67-79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평화를 바랍니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이 세상의 평화나 세계적인 평화 같은 크고 대단한 그런 평화보다 내 삶의 주변과 생활 환경에 평화가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살다 보면 삶의 의미나 기쁨이 사라지고 덧없는 마음과 회의감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난감한 문제들 앞에서 답 없는 질문만 던지며 무기력해질 때도 있죠. 어두운 방 안에서 이불을 덮고 숨죽여 울거나 떨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여러분의 어둠에 주님이 빛이 되기를, 여러분의 일상이 평화로운 발걸음으로 나아가길 기도합니다.

 

 

 

12월 25일(수) 주님 성탄 대축일(낮)

요한 1,1-18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 요한 복음 1장은 이렇게 노래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사람이라고 번역된 원래 그리스어 단어는 사륵스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사람이 아니라 ‘살덩이’에 가깝다. 인간을 뜻하는 안트로포스라는 단어가, 몸을 뜻하는 소마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요한 복음사가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단어, ‘살덩이’라는 단어를 굳이 쓴다. 왜일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사람이 되셨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겪는 인간, 때로는 힘들고 지쳐서 신음하는 그런 인간으로 오셨다는 뜻이다. 배고픔과 추위, 분노와 불안을 느끼는 구체적인 사람, 바로 나 같은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뜻이다. 나약하고 비루한 나 같은 사람과 함께하시기 위해, 그 영원한 로고스가 육이 되어 오셨다.

매번 맞는 성탄이 밋밋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매년 성탄을 맞지만, 같은 성탄은 없다. 세상이 바뀌고, 내가 바뀐다. 우리에게는 매년 새로운 어려움과 새로운 갈망이 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다시 태어나셔야 한다. 다시 태어나시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셔야 한다. 나라는 인간이 살아가는 이 자리,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바로 이 자리에서 나와 함께 걸어 주셔야 한다. 그러려고, 하느님은 사람이 되어 오셨다.

 

 

 

12월 26일(목)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마태 10,17-22“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 10,20)

 

그리스도인의 운명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고 초대교회는 믿었다. 박해가 되었건, 고통이 되었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런 것이라 믿었다. 오늘 복음이 박해의 원인을 ‘나 때문에’, ‘내 이름 때문에’라고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이 박해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시절의 이야기가 복음의 이야기고 초대교회의 이야기다.

우린 박해와 멀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멸시와 모욕의 대상이 된다는 것으로 여기는 시절이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복음의 이야기가 진정 기쁜 소식으로 전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린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제 삶을 꾸미고 다듬고 정갈하게 만드는 데 애쓴다. 누군가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는 일은 살면서 극히 드물게 맞닥뜨린다. 믿는다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라 여기는 오늘의 우리와 박해와 모욕, 멸시를 아버지의 영과 함께 견뎌 내었던 초대교회의 신앙인들 사이의 간극은 어떻게 셈할 수 있을까.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한걸음 내디뎠던 신앙이란 걸, 저 자신 때문에, 자신의 체면 때문에 한걸음 물러서서 후회하지 않길, 아버지의 영께 겸손되이 청해 본다.

 

 

 

 

12월 27일(금)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요한 20,2-8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빈 무덤을 두고 벌어진 세 제자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사랑받는 제자가 베드로를 기다렸다는 점에 주목하여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뜻한다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빈 무덤을 먼저 찾은 막달레나가 여성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부활의 첫째 사도는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양한 관점은 무덤에 도착한 순서에 주목하고 있지요. 빈 무덤을 찾은 순서를 서열이 아니라, 신앙의 단계로 이해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이른 새벽 무덤을 찾은 막달레나는 간절히 주님을 찾았던 ‘희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빈 무덤을 처음 체험하고 알린 ‘희망’의 사도였던 셈이지요. ‘희망’의 외침을 듣고 두 사람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사랑의 사도’ 요한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모든 사람에 앞서 신앙을 고백한 ‘믿음의 사도’ 베드로였습니다. 이를테면 부활 신앙은 언제나 ‘희망’으로 시작됩니다. ‘희망’은 ‘사랑’과 ‘믿음’을 재촉하고, ‘사랑’이 앞서나가지만, 그 사랑은 ‘믿음’이 고백될 때 완성됩니다. 그리고 다시 뒤따른 ‘희망’은 그제야 응답을 받게 됩니다.

부활을 신앙하는 우리 각자는 어느 발걸음에 머물고 있습니까. 희망입니까, 사랑입니까, 믿음입니까. 그 어떤 걸음이든지 계속 달려갈 때 부활을 체험할 것이라고,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12월 28일(토)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마태 2,13-18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아기 예수님을 찾는데 실패하자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러한 헤로데의 모습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잔악해질 수 있는지를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듯합니다. 사실 이러한 헤로데의 모습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오늘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의 모습들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에서 또 한가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헤로데는 결국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이기적이고 잔악한 행태가 비록 수많은 생명을 앗아갈 수는 있었을지언정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역사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폭력과 갈등, 그리고 이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아픔 속에서도 좌절이나 낙담보다는 희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역사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그 어떤 잔악한 욕망도 세상의 근본적인 가치와 질서를 무너뜨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12월 29일(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루카 2,41-52

 

·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2장 41-52절을 큰소리로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가족 모두가 했던 일은 무엇입니까?(42절)

- 예수님이 없음을 알게 된 부모는 어떻게 했습니까?(45절)

- 사흘 뒤 발견된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으며 부모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46-49절)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 말씀길잡이

<상실을 실패로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는 무언가를 잃었을 때 단순히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 잃어버림이, 그 상실이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길일 수 있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오는 길에 아들을 잃어버립니다. 늘 그랬듯이 일행 중에 있으려니 생각했지만 아들 예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흘을 꼬박 찾아다닌 끝에 성전에 머물고 있는 예수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되찾은 기쁨도 잠시, 아들 예수는 왜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냐며 의아해 합니다.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이 상실이라 생각했던 순간이 열두 살의 예수에게는, 진정한 삶의 길을 발견한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상실의 순간은 많습니다. 특히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상실을 통해 우리가 또 다른 길을 볼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길은 어쩌면 애초에 걸었어야 했던 진정한 나의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상실을 실패로 만들지 마십시오. 상실을 통해 진정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찾으십시오.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1) 다음 질문 안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봅시다. 그중 한가지를 선택해서 공동체와 함께 나누어 봅시다.

① 가장 마음에 와닿은 말씀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상실을 통해 소중한 무언가를 배운 경험이 있습니까?

③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2) 우리 공동체가 한 주(달) 동안 함께 노력해 볼 실천사항을 정해 봅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공동체에 맞는 기도나 성가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바칩니다.

 

 

 

12월 30일(월)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루카 2,36-40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한나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생각했을 때, 84세에 이르기까지 과부로 지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여러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은 그런 어려움에서 조금 더 나아간다. 한나가 지니고 살아야 했던 사회적인 상태를 숨기지 않되,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가 누리는 기쁨에 힘을 싣는다. 시메온이 아기를 보고 환호했다면, 한나는 거기에서 한 발짝 나아가, 아기의 이야기를 전한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분이 가져다주실 구원의 의미를 이스라엘의 모든 이들에게 알릴 수 있음에 감사했다. 마치 지금까지 자신의 고생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 것 같이 말이다. 아쉽게도 한나의 삶은 몇 줄로 매우 짧게 요약되어 있어 더 많은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래도 그가 어려운 조건을 디딤돌 삼아 기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우리 것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이들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가 이 세상에 모시고 올 아기 예수님께서도 한층 튼튼해지고 또 성장하실 것이다.

 

 

 

12월 31일(화)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요한 1,1-18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한 해의 마지막인 오늘, 한 해를 돌아보며 지난 시간 살아온 모든 일들에 감사드리고 또 한 해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다짐 아래 여러분 자신을 다시 한번 추스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한처음에 함께 계셨던 하느님”, 나의 모든 순간, 나의 모든 시작, 또 지금의 시간이 있기까지 분명 그분이 함께해 주셨기에 가능했던 시간입니다. 나를 괴롭혔던 시간, 걱정 가득했던 시간,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힘들었던 시간도 지나갔습니다. 그때는 어둠이었지만, 주님은 빛으로 이끌어 주셨죠. 하지만 지금 새로운 해를 맞이하며 각자 또 다른 근심과 걱정이 있겠지요. 그래서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지하고 싶고,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겁니다.

근심 걱정 앞에서 다른 무엇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나의 삶에 대한 희망의 고민과 선택이 되어야 합니다. 그 선택의 첫걸음에 하느님이 함께 걸어가 주실 겁니다.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사람들 가운데서 빛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 또한 증언의 빛이 되겠죠. 그래서 서로의 빛을 알아본다면, 그 빛은 더욱 큰 빛으로 번져 가고, 어둠은 점점 사라져 갑니다. 한 해 수고 많으셨고, 새해에도 여러분이 가야 할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