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북진성당 준공
중국 헤이룽장(黑龍江省)교구 해북진(海北鎭)성당이 드디어 완공됐다. 국내 신자들의 큰 관심과 지원 속에 2000년 10월 19일 오전 9시 30분 봉헌된 해북진성당 새 성전은 대지 5,000여 평, 연건평 1,000여 평의 흰 타일을 붙인 고딕식 건물로 지하 1층엔 사제관, 수녀원, 소성당, 교리실, 사무실, 회의실 등으로 꾸며져 있으며 지상 1층에는 대성당이 들어서 있다.
2000년 6월에 기공, 10월에 봉헌된 해북진성당은 성전건립 비용 대부분을 국내 신자들의 성금으로 충당해 한국천주교회가 주도하고 있는 중국교회 지원의 또 하나의 가시적인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 4천여 명 신자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인 해북진성당 건립에는 4억여 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었으며, 1966년 문화혁명 당시 파괴된 구(舊) 해북진성당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지린(吉林)교구장 장한민(張漢民) 주교 주례, 최영수 대주교(당시 대구평화방송 사장), 김명동 신부(한국외방선교회), 이근덕 신부(수원교구), 김광우 신부(한국외방선교회)와 나를 비롯해서 흑룡강성 신부 등 16명 사제단의 공동 집전으로 봉헌한 이날 미사에서 장주교는 강론을 통해 “훌륭한 성당을 봉헌할 수 있도록 사랑을 실천해 준 많은 한국 신자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나는 인사말을 통해 “공사에 적극 협조해 준 인민정부, 건설업체 등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이번 해북진성당 봉헌이 양국 교회의 친선과 발전에 한몫 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당시 봉헌식과 미사엔 중국 지린(吉林), 쟝츈(長春), 션양(瀋陽), 티엔진(天津) 교구 신자와 헤이룽장 교구 신자, 한국 신자, 유학생 등 5천여 명이 참례해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티엔진 교구 신자들은 기차로 2박 3일간이나 걸려 봉헌식 전날인 18일 해북진에 도착하는 열의를 보였다. 또한 헤이룽장성, 천화이요우(陣懷友) 종교국장 등 정부 측 인사들도 대거 참석했다.
예상 건축경비 3억원으로 시작된 이 성당은 겨울 추위로 벽돌이 균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외장 전면(全面)에 타일을 부착하는 등 설계 변경에 따른 추가 경비 5천여 만 원의 마련을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한편 해북진성당 건립에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수많은 국내 신자들의 성금이 답지했고 중국 내 한국인 신자들은 묵주 판매에 나서기도 했다. 나는 2000년 4월에 한국에 돌아가 은퇴식을 하고 축하금으로 모인 4,000만 원 모두를 기금으로 보탰다.
그날 가톨릭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했던 첫 말이 “‘이제 나는 죽어도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지역 사회 안에서의 역할 등 해북진성당의 장차의 모습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지금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 왜냐하면 그 옛날 인구 1만 2천 명 중 8천 명이 신자였고 지금은 3만여 명이라 하지만 대부분이 신자 후손들이다. 지금도 4천여 명의 신자가 있다. 새롭게 지어진 아름다운 성당에는 더 많은 신자들이 생길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공무원 중에도 많은 신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이들이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성전 모금을 하면서 기억나는 일에 대해서는 “처음 가톨릭신문에 기사가 났을 때 어떤 분이 단독으로 짓겠다고 해서 얼마나 고맙고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몇 달 후에 단 한 푼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일이 잘 안되어 당장은 못 내겠다고 할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실망감에 앞이 캄캄했다. 지금까지 그 신자로부터 연락이 없다. ‘이제 다 지었으니 안심하기 바란다.’고 전하고 싶다. 또 한 가지는 대구 계산동 본당에 다니던 한 가족이 힘을 합쳐 아주 큰 돈을 봉헌했다. 너무 고마웠다. 이와 함께 대구대교구 프라도 회원 신부님들이 많은 헌금을 했다. 프라도 신부님들의 생활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더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수원교구 어떤 신자가 ‘절대로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며 큰 돈을 기증해 왔다. 이 밖에도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많은 분들이 있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는 이들 은인들을 위해 남은 삶 동안 감사히 기억하고 기도드릴 것을 약속한다.”
- 예상보다 공사비가 많이 소요됐다는데….
“성당은 완공했지만 아직 갚아야 할 빚이 약 5,000만 원이 있다. 도와주실 은인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린다.”
- 중국 교회와 관련, 앞으로 계획에 대해….
“어떤 분들은 ‘한국에도 할 일이 많은데 모금까지 하면서 왜 그리 애쓰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라.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은 한국에서 선교하다 치명해 성인품에 오르기도 했다. 그분들은 자기 나라에 할 일이 없어 머나먼 타국에 와서 생명까지 바쳤는가? 한국 신자들의 신앙 밑거름이 된 중국교회를 돕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힘닿는 대로 노력할 것이다.”
2001년 2월 4일자 가톨릭신문은 해북진성당 완공과 함께 봉헌미사를 드린 후 내가 보낸 감사의 편지를, 10월 19일자 해북진성당 봉헌식, 봉헌미사 등 각종 행사 장면이 담긴 사진을 특집으로 하여 함께 게재했다.
『해북진성당 봉헌식을 무사히 마쳐 무척이나 기쁩니다. 대지 5,000여 평, 연건평 1,000여 평, 수용인원 4,000여 명에 대성당, 소성당, 사제관, 수녀원, 회의실 등을 갖춘 대성전의 완공은 오로지 하느님 은총 덕분입니다.
머나먼 여정에 함께 동참, 봉헌식에 참가해 준 대구평화방송 사장 최영수 대주교, 부산교구 박경수(요한)씨, 한국외방선교회 김명동·김광운 신부, 수원교구 이건덕 신부,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전정자(엠마) 수녀께 감사드립니다. 또 하얼빈의 김경숙 자매에게도 더불어 고마움을 전합니다.
총 건립비용 35만 달러(공사 당시 기준 한화 약 4억원)가 소요된 이 성전공사에는 참으로 많은 국내 신자들, 중국에 거주하는 교포 신자들의 정성어린 도움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또한 전에 성전건립 기금을 봉헌하기로 약속하신 분들, 이젠 완공됐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성전건립의 기쁨을 다함께 나눕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성당 밖에서 미사 참례를 할 수밖에 없었던 해북진성당 신자들, 겨울이 되면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곳에서 벌벌 떨며 미사에 참례하던 해북진성당 신자들이 이젠 조금은 추위에서 벗어나 더 열심히 기도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이번 새 성당 봉헌식 때 신자들인 “이젠 미사참례 하는데 비나 추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앞에 생생합니다. 해북진성당 신자들은 물론 인민위원회에서도 “감사드린다.”라는 말을 수없이 하면서 “한국 신자들에게도 고맙다.”란 말을 전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북경에 있으면서 해북진에 왔다 갔다 하면서 성당 건축 과정을 참관하러 다녔다. 거의 마지막 단계쯤 해서 초가을인데 날씨가 상당히 쌀쌀했다. 나는 그날 하얼빈에 도착해서 호텔에서 자고 새벽에 해북진으로 들어갔다.
해북진에 가서 하루종일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을 돌아보고 볼일을 보고서 오후에 하얼빈행 기차를 탔다. 나는 혈압이 높아서 추위에 조심을 해야 하는데 그날따라 기차 안이 몹시 추웠다. 언 몸으로 하얼빈에 내리고 보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호텔에서 자고 이튿날 가까스로 북경에 왔다. 다시 지병이 도지는 것 같아서 한국으로 갈 차비를 했다.
그때 주위에 있던 의대 학생들이 이런 병이 걸리면 한국에서 여기로 오려고 애쓰는데 왜 한국으로 가려고 하느냐면서 자기가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의대 교수한테 가서 의논을 하니깐 당장 입원을 하라고 했다. 동직문(東直問) 병원이었다. 그 병원에 한 달쯤 입원해 있으니까 차츰 나아졌다.
그렇게 중국에서의 사목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이제 내게 남은 세월이 얼마일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맨 처음 신부가 될 때 지기로 결심한 십자가를 지고 아직도 몇 구비의 여울을 엎어지며 다시 일어서며 넘어가야 하리라. 그리하여 그분이 계신 그 기슭에 가서 그분과 합류하여 나의 십자가를 받아주실 때, 그때 나는 비로소 편히 쉬게 되리라.
* 알립니다
<김영환 몬시뇰의 세상이야기 >는 필자의 건강상 이유로 이번 호로써 끝을 맺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다음 기회에 또다른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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