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철암, 철암역입니다.”
설핏 든 잠이 화들짝 달아났다. 기차는 바다처럼 깊은 밤을 건너 철암에 도착했다. 세발짝 뗄 때마다 한 번씩 손수건으로 이마를 눌러야 했던 더위는 밤의 철암엔 흔적조차 없다. 내가 건너온 것은 대구와 철암이란 공간이 아니라 여름과 가을이란 시간이 아닐까 잠시 의심을 하다가, 잘 도착했는지 궁금해 할 대구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 응. 참, 근데 대구는 아직 더운가봐?(이날 대구는 열대야로 사람들이 부옇게 밤을 새웠단다).”
이곳 철암은 태백시에 속하는 한 동이다. 알려진 대로 태백 인근은 한때 국가의 기강산업이었던 탄광산업의 중심지였고, 철암도 강원탄광과 대한석탄공사를 중심으로 활기에 넘치던 탄광촌이었다.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을 찾아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상권을 포함한 생활권이 편성되었다. 철암공소도 이 현장과 자리를 같이 한다. 태백의 장성성당에 소속된 이 작은 공소는 한때 미사 드리는 사람만도 70~80명(당시 공소로선 많은 숫자였다)을 헤아렸다. 그러다가 나라에서 ‘석탄합리화정책’이란 이름으로 탄광을 줄여나가자 한때 융성했던 강원탄광도 문을 닫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철암을 떠나갔고, 그 만큼 공소 신자들도 줄어들었다. 그러자 90년 초반, 신자수가 적다는 이유로 남아 있는 교우들의 뜻과는 관계없이 공소는 문을 닫고 교우들은 셔틀버스를 이용해 장성성당으로 미사를 드리러가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이 몇 명이든 철암공소란 장소는 미사만을 위해 모였다 헤어지는 곳은 아니었다. 그곳은 작은 공동체가 지친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이었으며, 일상에 파묻어둔 주님을 거듭 확인하는 장소였고, 이웃끼리 만나 서로의 생활을 나누는 모두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이런 저런 사정 끝에, 3년 전 공소는 다시 문을 열었고, 신학원을 졸업한 평신도 선교사까지 어엿하게 모셨다.
박유아(안젤라) 선교사가 공소지기가 된 지는 이제 3개월. 전에 계시던 이냐시오 선교사의 뒤를 이어 받았다. 바쁘게 사는 것이 미덕인줄 알았던 도시 생활습관은, 이곳에서의 3개월을 통해 많이 무뎌졌다. “94년 신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의 성당에서 예비신자 교리와 견진성사 교리 등을 가르쳤어요. 공소 소임을 맡고 싶었던 것은 신학원을 다닐 때부터였죠. 쉬는 교우 회두나 교우들의 신앙을 돌보는 것 등 할 일은 많은데 눈으로 보이는 어떤 일이 없어 오히려 어려웠는데 이젠 점점 익숙해져 가요.” 현재 공소에 적을 둔 세대는 약 40가정. 그 중 30명 정도가 미사나 예절에 참례한다. 미사는 2주에 한 번, 장성성당에서 박흥준(요아킴) 신부님이 오셔서 함께 드리고, 한 주씩은 공소예절을 올린다.
이곳 교우 대부분은 아직 탄을 캐내는 대한석탄공사에서 일하고 있다. 공소의 이것 저것, 작은 일까지도 보살피는 공소의 살림꾼 최병철(암브로시오, 총무) 씨가 이곳 철암에 온 것은 9년 전의 일이었다. 부산에서 다니던 직장을 잃고 우연히 대한석탄공사의 직원 모집 공고를 보고 매형, 형님과 함께 1월에 이곳에 왔다. 황량한 1월의 철암의 풍경은 이들 세 명에게 도착하자마자 소주잔을 기울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형님은 다른 일을 찾아 이곳을 떠났고 매형과 암브로시오 형제는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딱 1년만’ 이곳에서 일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해 9월, 철암에 마련한 터에 아내 레아 자매와 세 남매를 데리고 왔고 1년은 2년이, 2년은 4년이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때 중학생, 초등학생이었던 남매는 모두 대학생이 되어 아들은 군에 있고 두 딸은 대구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 “9년 전만 해도 이곳 경기는 좋았죠. 사람들도 많았고. 지금은 폐광되면서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갔죠. 공소 주변에도 빈 집들이 많아요. 아예 집터도 허물어져 지금은 텃밭이 된 곳도 많구요.” 지금이야 생산보다는 안전에 더 신경을 쓰며 작업을 하지만 탄광일은 위험한 일이다. 특히 물이 고여 있는 곳을 잘못 건드려 갱에서 물보가 터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생명을 장담할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요. 수직갱에 들어가면 거기 온도가 한 35도 정도는 돼요. 일을 다 마치고 나오면 신었던 장화에 물이 철벅철벅 차 있는데, 그게 다 땀이예요, 땀.”
암브로시오 형제는 석탄공사의 관사인 아파트에서 아내 레아 자매와 함께 살고 있다. “첨에 여기 왔을 때, 저도 참 막막하더라구요.” 아내 레아 자매의 이야기다. “그리고 여기 와서, 주님을 잊은 것은 아닌데 공소에 나가질 않았어요. 사는 동안 계속이요. 그런데 그 전에 계시던 이냐시오 선교사님이 늘 입버릇처럼 ‘레아 자매는 꼭 성당으로 나와야 하는데’ 하고 말씀하셨데요. 그러다가 제가 많이 아파서 병원엘 갔는데, 세상에 암이라잖아요. 그래서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성사를 보고 병원에서 검사 받으면서 기도를 했어요. 앞으로 저를 주님 일에 도구로 쓰이도록 바치겠다고. 그리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봤더니, 바로 운전봉사더라구요.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면허도 2종에서 1종으로 바꿨어요. 하느님이 그런 저를 받아주셨음일까요. 약물이나 방사선 치료도 안 했는데 병원에서 더 이상 암세포가 퍼지지 않는다며, 그러니까 다 나았다며 퇴원하라 그러더라구요. 원인은 자기들도 모르겠대요. 더 은혜로운 것은 퇴원하는 그 주가 바로 부활시기였어요. 정말 멋진 사순절과 부활절이었죠.” 레아 자매는 지금도 여전히 공소에 있는 승합차로 주일, 평일 할 것 없이 성당에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자신의 시간과 멋진 운전솜씨를 내어준다.
다른 곳도 그렇겠지만, 이곳에도 쉬는 교우들이 많다. ‘평일은 열심히 일하고 주일은 쉬는 시간’ 이 기준 대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돈도 좀 있고 여유도 좀 있어야 가능할 것 같은 종교생활에 대한 선입관이 아직 조금은 남아 있다. 안젤라 선교사님이 이야기한다. “마음이, 참 완고들 해요. 저만 보면 그냥 보기 미안해서 ‘나가야죠’ 하지만 사실은 하느님 존재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받아들일, 아니 자기 가슴 속에 묻어두고 잊어버린 하느님을 확인하려들지는 않죠. 어떻게 하면 이분들에게 존재하는 그분을 확인시킬까 고민하지만 무작정 나오라고 강요하진 않아요. 일단 이웃으로서 관계를 두텁게 만드는 거죠. 그리고 이웃들끼리 참 인심 좋고 잘 지내지만 알게 모르게 서로들 간에 상처가 참 많아요.”
철암에서의 삶은 발전, 도약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삶이다. 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생활하며, 폐광이 되어 더 이상 광부로서의 자신을 어디서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언제나처럼, 또 다른 곳에서 생활은 다시 펼쳐나갈 것이다. 지금의 삶이 이러니까 미래에는 요렇게 되겠지, 미래에 요렇게 되려면 지금은 저렇게 해야지,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것은 올무에 씌인 듯 허겁지겁 살아가는 도시 사람들에게나 적합한 말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이겨야 할 일도 없다. 서로가 아는 고만고만한 살림이기에 상대적으로 내가 가난하다는, 그래서 너무나 불행하다는 생각도 없다. 이런 비슷한 삶의 조건은 공소 공동체가 보다 더 든든히 다져지는 기초가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소외계층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홀로 남겨진 어르신들도 많고, 광부로 열심히 일하던 가장이 진폐증에 걸려 경제력을 잃어 불행한 상황에 처해진 가정도 많다.
염창권(미카엘) 형제가 철암 사람이 된 지는 이제 4년째. IMF의 영향으로 서울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미카엘 형제도 역시 석탄공사에서 일한다. “누구나 다 알 거예요. 처음 여기서 생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낯설고, 일도 힘들고. 그래도 지금은 좋아요. 여기 온 덕분에 신앙도 가질 수 있었구요. 서울의 각박한 인심과는 비교 안 되게 사람들 마음 좋구요, 이웃들과 사귀기도 좋아요.”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폐광이 될 거란 그림자는 그에게도 드리워져 있다. 뚜렷한 대체 산업이 없는 이상, 석탄공사가 문을 닫는 것은 공소 역시 사람이 확 줄어들 거란, 그래서 문을 닫을 지도 모를 이야기이기에.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미카엘 형제나 공소 사람들이 걱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서울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없느냐는 질문에 미카엘 형제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부풀린 욕심, 거두어 들이기 바빠 부르튼 손. 가진 것에 따라 천차만별로 구분되는 너와 나. 누가 수직적인 삶과 수평적인 삶의 행복을 저울질 할 수 있겠는가.
임병영(요셉, 공소회장) 회장님은 영세한 지 이제 1년 4개월 정도. 예순다섯 남짓한 연세에도 젊은이들에게나 나이드신 분들에게나 한결같이 유쾌하게 대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계신다. 경북 문경이 원래 고향인 회장님은 오랫동안 철도청에서 일하시다 퇴직하셨다. “아이고, 내 아내가 열심히 다녔지. 나는 사실 영세한 지도 얼마 안됐고, 신앙도 그렇게 깊지 않고 해서 공소 회장을 얼마나 할 뭐가 안될 것 같았어요.” 그래도 신부님의 갖은 설득에 결국은 겸손하신 우리 회장님도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정선 카지노 같은 대체산업에 대한 비젼을, 이곳도 품고 있는 것일까. “여름에 시원하고 열대야는 아예 없고 모기도 없고. 겨울이 추워서 그렇지 환경으로 치면 살기는 좋은 곳이예요. 그런데 앞으로 폐광이 되고 나면 할 뭐가 없어요. 관광사업이다 뭐다 말은 많지만, 그런 거야 정말 해야 하는 거구요. 저 위에 무슨 온천이다 해서 목욕탕 비슷한 거 한다 이야기 있는데, 그것도 움직임 없어요. 공장을 세우려고 해도 여기 산악지대가 되다보니 산업용 용수를 댈만한 물줄기도 없거든요. 분명히 살기는 좋은 동네인데 사람들은 자꾸 나가야 되고. 태백시 인구만도 13만에서 5만으로 확 줄어들어버렸다고 하잖아요. 이런 현실이 아쉽긴 해도 주어진 속에서 서로 즐겁게 살아요.”
얼마 후 있을 3명 예비신자의 영세식. 공소 역사 이래 처음으로 본당이 아닌 이 공소에서 올리는 영세식이기에 이날을 준비하는 교우들의 마음은 남다르다. 무늬만 신자가 되지 않도록 선교사님으로부터 오랜 시간 신앙의 기초를 단단히 다진 이들. 큰 도시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대단위 강좌가 아닌, 아늑한 공소 관사 큰방에서 서로 마주보고 앉아 정을 나누며 깨친 교리이니만큼 이들 예비신자분들의 신앙 내공은 기존 신자들에 딸리지 않을 듯하다. 또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새로이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이 영세식은 공소 교우 각자에게 조금씩 의미를 두고 있다.
일상에 주어진 작은 행복에 감사하고, 이마에 ‘주님’이라고 써붙이고 다니기보다는 마음속에 조심스레 보듬어둔 사람들. 살기 바빠 그 존재가 조금은 묻혀버리더라도, 이곳 공소가 있기에, 공소에 모인 - 때로 상처를 주고 받더라도 서로를 열어보인 - 이웃들이 있기에, 나를 내신 분, 내 고난과 함께 하시며 내 일상을 토닥이시는 그분을 절대 잊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