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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탁발승을 위하여
날이 밝아올 때까지


한상봉│격월간 <공동선> 편집장, 농부

 어린 시절엔 집집이 돌아다니며 시주를 청하는 탁발승들을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이런 탁발의 전통은 어느덧 시류時流에 밀려나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서울 나들이길에, 충무로 전철역 4호선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는 통로인 계단을 내려가다가 칠순은 됨직한 나이 지긋한 탁발승을 보았다. 불전함 옆에는 잡동사니를 담은 듯한 비닐백이 놓여져 있었고, 흰 운동화 차림의 스님은 방석 대신으로 신문지를 여러 겹 접어 절을 할 때 무릎과 팔꿈치를 괴었다.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내내 지하 플랫폼에 울리는 목탁 소리를 들었다. 스님은 한차례 승객들이 몰려 간 뒤엔 잠시 신문지를 깔고 앉아 포개놓은 발 옆에 목탁을 내려놓고 숨을 돌리시면서 천장에 무심한 눈빛을 던지곤 했다.

 

잠시 후 또 한 차례 승객들이 계단을 우르르 몰려 내려올 기세가 보이고 스님은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그저 불특정 다수를 위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행복을 빌어주며 목탁을 두드리고 돌바닥에 이마가 닿도록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부처라는 뜻일까. 제 밥벌이를 하느라 안달하는 사람들, 생존경쟁에서 밀려나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 물 만난 고기처럼 파득거리며 배낭을 메고 여행 떠나는 사람, 그 무더운 날에도 양복을 단정히 입고 넥타이를 매고 머리카락은 무스를 발라 올려붙인 채 007가방을 든 청년, 한 아이는 등에 업고 한 녀석은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엔 종이백이며 검정비닐 봉지 여럿 쥐고 걷는 아녀자들, 칼칼해 보이는 노인네나 야시시한 처녀들이나 철모르는 아이들에게도 따지고 보면 모두 속엔 부처가 들어앉았다는 것일까.

 

그러나 북새통 속에서 한떼의 승객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동안에는 불전함에 던져지는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산다는 게 전쟁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지하철이라서 그런가, 마음이 있어도 가던 길 멈추고 스님을 돌아볼 여유를 가진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하였다. 다만 이 소동이 그치고 나서 뒤처졌는지 나중에야 계단을 타박타박 내려오던 노인네들과 몇몇 아이들이 불전함에 돈을 집어넣었다. 사는 게 바쁘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갈망하기에 그토록 치열한 삶에 몸을 던지고 있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다. 일단 ‘살고’ 보는 게 상책인 셈인데, 이제 서둘러 봐야 뾰족한 수가 없다고 믿어지는 뒤처진 인생들만이 정작 살아 있다. 아님 생존경쟁이 얼마간 유보되어 있는 아이들만이 남을 돌아볼 거룩한 과업이 남겨진 것일까.

 

모두가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지만, 그 불성이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게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러나 스님은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은 생애의 가장 밑바닥에서 들어 올리는 목탁소리를 선남선녀들에게 그저 담백하게 들려줄 뿐이다. 그 소리에 깜빡 놓았던 정신(본성)을 되찾는 사람이나 무심결에 그 마저 흘려버리는 사람이나 결국 제 몫의 업業대로 사는 것이다. 스님의 무심한 표정에서 오히려 안도감安堵感을 갖는 것은 내가 그만큼 부족한 탓이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 조바심 치지 않고 은근하게 나를 기다려 주는 어떤 시선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 심호흡 한번 더 하고 새롭게 걸어갈 용기를 준다. 하느님이 빛이라면, 그 빛이 지나는 통로가 되어 보기로 작심할 시간을 조금 더 얻은 듯 하다.


 

탁발托鉢이란 생애의 바닥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제 먹을 것을 거지처럼 구걸한다는 점에서 비굴한 짓인지 모르지만, 구걸을 수행修行의 한 방편으로 삼는다면 그다지 마다할 게 아니라고 본다. 사람이 살다보면 만나고 싶어 목이 빠지게 기다려지는 사람도 있고, 먼발치에서 보이기만 해도 발길을 돌리고픈 사람도 있다.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인데, 탁발이란 수행자에게 생존의 문제이므로 볼 것 안 볼 것 다 보고, 싫든 좋든 누구나 일단 만나야 한다. 게다가 언제나 약자의 입장, 구걸하는 자의 처지에서 타인을 만나야 한다. 그러다 보면 별별 더러운 꼴을 당하기도 할 것이고, 때론 관세음보살 같은 이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단 몇 푼에도 벌벌 떨면서도 행세 꽤나 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고, 없는 살림에 잔돈마저 탁 털어서 시주하고 싱긋 웃으며 가는 얼굴도 있을 것이다. 낮은 자의 처지에서 봐야 사물의 참모습이 제대로 보이기 마련이고, 천하만물을 올려다 봐야 천하만물의 바닥까지 보이는 법이다. 바닥에 엎드려 땅에 흙 묻히고 사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 발원하고 발원하며 목탁을 두드리는 이의 마음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형제인 해와 자매인 달’이라는 성 프란치스코를 그린 영화에서도 탁발 수도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추수 때에는 들에 나가서 농부들을 돕고 그들이 나눠주는 빵 한 조각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기뻐하는 이들. 비가 엄청나게 퍼붓는 거리에서 그 비 온통 맞으면서 노래 부르고 복음을 읽어주며 음식을 청하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 탁발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항상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절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경험을 누리게 한다. 우리 모두가 서로 기대어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타인이 착한 마음을 내지 않으면 우린 곧 질식하거나 굶어죽을지도 모른다. 해·달·별, 바람과 비와 미물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린 한 톨의 곡식도 얻을 수 없다. 급기야 하느님이 우리의 배경이 되어 주시지 않으면 우린 일분 일초인들 목숨을 이어갈 수 없다. 우린 살아있음만으로도 넘치는 은총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가 손을 내밀어 주지 않으면 나는 죽었다’ 는 것을 알게 하는 게 탁발이다.


 

사륜구동 코란도를 몰고 절 입구까지 나 있는 아스팔트길을 달려 산사山寺로 진입하는 스님을 보기란 요즘 그리 어렵지 않다. 빳빳하게 길을 들인 모시적삼에 감추어진 몸매를 설렁거리며 하늘 같은 밀짚모자를 쓰고 선방禪房을 오가는 비구·비구니들의 모습이 환하고 깨끗해서 좋은데, 뒤끝이 그리 개운하지는 않다. 저렇게 수행해서 부처가 된들, 지지리 못난 중생들에게 뭔 도움이 될까. 충무로 역에서 만난 그 노스님의 조금은 뻥 뚫린 듯한 눈매에서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은 아닐까. 모시적삼 입고 코란도 몰고 다니면서 탁발을 좋아할 스님이 계실까. 바람 살강거리는 방그늘에 앉아서 오시는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며 알 듯 모를 듯한 선문답하며 뒷돈을 챙기는 동안에, 수행자는 없고 종교가만 남는다.

 

마찬가지로 후원회란 조직을 통해 돈 모아 건물 짓고 우아한 언행으로 피정 지도하는 수도자 역시 대중의 피눈물을 몸소 겪고 그 발치에 엎드려 오히려 자비를 청할 용기가 없는 한, 영성은 물 건너가고, 대중의 영은 구원할 지언정 몸은 해방시키지 못할 것이다. ‘흩어지는 교회’라는 교회론이 나온 지 한참 되었지만, 세상의 간난신고艱難辛苦 속으로 파란만장波瀾萬丈함 속으로 강생하지 못하는 신앙은 어제나 오늘이나 ‘그들만의 천국’을 꾀할 뿐이다. 당장에 수행자이든 수도자이든 만사 접어두고 구걸하러 다니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영적으로만 가난을 이야기하는 편안한 길에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도 가난을 체험할 기회를 포착함으로써 부유한 은인들뿐 아니라 궁핍한 죄인들에게도 구원의 빗장을 열어줄 뜻이 없는지 묻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