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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헌대(봉헌바구니)
에파타


이성우 (아킬로)│신부, 대구대교구 봉덕성당

제가 아는 한 열심한 신자의 이야기 입니다. 젊어서 어렵게 미국비자를 받아 ‘어떻게 하면 미국에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궁리하면서 미국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미국 구경은 뒷전으로 두고 초청을 받을 만한 곳을 찾고 연결하느라고 시간을 다 보냈답니다. 그러는 가운데 주머니에 있는 돈은 거의 바닥이 나 200불 남짓밖에는 남지 않았답니다. 마침 주일은 닥쳐와 미사참례를 했는데, 혹시라도 경영(?)에 실수가 있을까 싶어 오른쪽 주머니에는 100불짜리를, 왼쪽 주머니에는 1불짜리를 넣고 헌금할 때 착오가 없도록 성당에 가는 내내 속으로 ‘오른쪽은 100불, 왼쪽은 1불’ 하고 거듭 확인을 하면서 성당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미사는 시작되고, 이 사람에겐 미사 중에도 ‘과연 미국에서 공부할 가능성이 있는가?’하고 분심만 들었습니다. 게다가 강론을 다 알아 들을 수가 없어 더욱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헌금을 거두는 연보채가 앞에 쑥 내밀어 지더랍니다. 그래서 얼떨떨결에 오른손으로 돈을 꺼내어 헌금을 하였습니다. 순간,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헌금한 돈은 100불 짜리 였습니다. 아직도 며칠을 더 보내야 집에 돌아 갈 수 있는데 전 재산의 반을 하느님께 바친 격이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후회한들 소용도 없고 해서, ‘하느님, 이제 다 바쳤으니 나 좀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더랍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미사 후에 누가 좀 보자고 해서 만났더니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도와주면 좋겠는가 묻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 덕분에 미국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지금도 미국에서 살고 있답니다.

이번에는 헌금 바구니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오늘날과 같이 헌금을 걷어서 교회를 유지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성찬의 전례를 위하여 따로 마련된 교회가 없었으니 넓은 집을 소유한 신자가 마치 오늘날 소공동체나 반모임을 할 때와 같이 자기집에 초대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때는 집에 있는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차차 신자수가 늘고 또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가페(애찬)쪺를 같이 하게 되자 각자가 분수대로 음식(예물)을 가져다 차리고 사랑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봉헌과는 별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모금이나 헌금은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금이 때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 되도록 빵을 가져다 바치고 미사 후에 나누어 주는 식의 자선으로 되어 미사와 결부 되었을 것입니다.

 

봉건사회에 있어서 한 고을의 주인은 언제나 영주이고 한 나라의 주인은 임금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을 위하여 교회를 짓거나 유지하는 것은 임금이나 영주의 몫이었습니다. 따라서 헌금이 있을 리가 없었죠. 그러나 주일날 가난한 사람을 위한 헌금은 가끔 있었고 오늘날에도 2차 헌금 등으로 계속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번은 파리에 가서 주일 미사를 참여하는데 헌금 바구니가 그 짧은 미사 중에 3번이나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구니 위에는 무엇 때문에 헌금이 필요한지 제목을 적어 놓았습니다( 가령, ‘산간학교를 위하여’ 등)

 

지금 우리와 같이 헌금을 바쳐 교회를 유지하는 것은 전교지방, 특히 미국이나 한국 같은 특수 지방에만 있는 독특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일에도 주일 헌금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언제나 그의 주일마다 특별한 목적이 정해져 있습니다 (가령, 전교지방·고아원·양로원 등을 위해). 그런데서 교회 유지는 종교세로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프랑스 신부님들이 처음에 오셨을 때는 너무나 가난해서 교무금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종교의 자유를 얻고나서는 교무금을 일년에 한 번(가을에) 내기 시작했고, 특히 방인 신부가 탄생하여 사목을 담당하게 된 20세기 초부터 조금씩 신자들의 협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일 헌금은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주일마다 미사에 참석할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되지 않은 것도 이유이지만 돈을 만져보지 못하고 가난하게 사는 신자가 대부분이었고, 심지어는 서양 신부님들이 사주는 땅을 부쳐 겨우 연명하는 신자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차대전이 일어나 외국 신부님들이 전교활동을 못하게 되고 방인 신부님들이 무일푼으로 교회를 맡게 되자 우선 교회유지가 급선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무금과 같이 주일 헌금이 전면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연보돈’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잠자리채 모양으로 만들어 복사가 걷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미약하여 겨우 제병이나 살 수 있을 액수에 해당했고 또 대부분 그것도 못내서 ‘패스pass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가 처음 독일에 갔을 때 독일 사람들은 제대 앞에 연보통(봉헌대)을 놓고 모든 사람들이 나가서 봉헌 예물을 바치는 것을 보고 참 좋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학생 때 미국에서 오신 양기섭 신부님이 명동성당에서 직접 연보를 걷어 큰 성과가 있음을 봐왔기 때문에 독일 사람들의 방식이 더 합리적이고 전례에 맞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귀국한 1970년부터 대구교구에서(삼덕성당)는 미사 때 봉헌대를 놓고 앞으로 나와서 봉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급한 신부님들은 직접 바구니를 들고 신자들이 앞으로 나와서 봉헌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례에 맞아서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30년 전이지만 그때만 해도 어린이들은 주머니에 돈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돈이 없는 어린이들은 앞에 나와서 절만 하고 들어가도록 해주었습니다. 물론 봉헌금을 받아 도중에 절반 까먹고 후에 성사보는 어린이들도 많았습니다.

 

이제 미사 봉헌금은 미사 전례 안에 정착했고 교회 유지의 절반을 감당하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봉헌금이 아무리 많아지고 교회 유지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정성이 들어있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시내 본당에서는 가끔 시골 본당에서 와서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2차 헌금을 거두는 일이 있는데 보통 주일헌금 보다 10배를 더 바치는 일을 자주 봤습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정성입니다. 정성이 있으면 지금 우리가 바치고 있는 헌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을 다 바쳤다면 우리는 미사성제에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정성을 바쳐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신자들이 바친 헌금을 돈 세는 기계도 싫다고 뱉어 버리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정성있는 신자라면 주님께 바치는 것은 무엇이나 흠없는 깨끗한 제물이어야 하거늘 우리는 왜 실천을 못할까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것을 용서하여 주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청하는 것처럼 우리가 바치는 제물이 깨끗하고 흠없는 제물일 때 하느님은 그 많은 청원가운데서도 우리 것을 먼저 알아보실 것입니다. 실수로 100불을 헌금한 한 청년의 걱정도 들어 주셨는데 매주 정성되이 깨끗하고 흠없는 제물을 봉헌하는 신자들의 청원이야 거절하실 리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