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복사 인선문제
복사服事라는 말은 ‘복종하여 섬김serving’을 뜻하는 것인데 요즘의 용어로는 비서秘書에 해당되며 또는 총무, 사무장으로도 통한다. 개신교에서는 집사執事라 한다.
“주교복사에 관한 문제는 대구 교우들의 큰 관심사이다. 이미 내가 도착하던 날에 서 아오스딩(서상돈徐相燉)은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기 위해 한 정거장 앞에 와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서서히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몇 가지 징후들로 미루어 복사를 대구 밖에서 데려오는 것이 나을 것으로 생각되어 나는 언양彦陽 부근에서 한 청년을 오게 했다. 그의 이름은 김 야고보(김영은金永垠)인데 공부를 모두 마쳤고 일본어에 능통하며 보기에는 별로 좋지는 않지만 튼튼한 체격이다 … 그는 오늘 저녁에 도착했다.” - 드망즈 주교 일기, 1911년 7월 14일
경남 언양의 순정蓴亭공소 회장의 둘째 아들이며 조부는 순교자인 김영은 주교 복사는 1888년생으로 이때, 24세의 젊은이였다. 당시엔 주교관도 교구청 건물도 없던 때이므로 가족은 고향에 두고 혼자 대구로 부임했는데 그는 이때부터 1945년 1월 31일까지 약 35년 간 대구교구청 사무장으로 충실하게 근무하였다.
처음 맞은 대축일
드망즈 주교가 대구에 부임하여 처음 맞은 성모몽소승천대축일에는 성대한 경축행사가 있었다. 대구주교좌성당은 지은지 8년이 되니 성당 내진內陣의 칠이 너무 벗겨지고 더러워 페인트칠을 다시 했는데 그 일이 8월 11일 끝났다. 8월 15일(화요일) 대축일 전례典禮는 많은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하게 거행되었는데, 성당이 비좁아 참석자 모두가 더위로 애를 먹었다. 주교 일기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아주 좋은 첨례날이었다. 그러나 성당은 얼마나 비좁은가! 저녁 때에는 학생들의 훌륭한 축제가 있었다.”
명도회明道會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謀(야고보) 신부에 의해 세워진 평신도들의 교리연구 및 전교활동 단체 명도회明道會·明會는, 1795년 최초의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가 북경北京 교회에 세워져 있던 그와 비슷한 회(종교조합宗敎組合)를 본떠서 만든 것으로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모임’ 이라는 뜻이었다. 회장으로는 정약종丁若鍾(아우구스티노, 순교자, 정하상丁夏祥(바오로) 성인의 아버지)을 임명하였으며 여자 회장은 순교자 강완숙姜完淑(골롬바) 이었다.
명도회원들은 우선 자신들이 천주교에 대해 깊은 지식을 얻으려 노력하고 다음으로 그것을 교우와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도와주었다. 주 신부는 이 회를 위하여 개최되는 장소, 사회자의 임명, 남녀가 유별될 것들에 관한 것 등을 규정해주었으며, 회는 점차 전국으로 보급되어 굉장한 성과를 거두었다. 내용이 엄격한 <명도회규明道會規>도 주 신부가 직접 만들어 시행케 했는데, 그 회규 자체는 오늘날 전해진 것이 없다.
하지만 신유辛酉년(1801) 대교난 이후 약 100년 간 박해 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명도회는 활동을 할 수 없었고 신교자유가 허용된 후에도 얼마 동안 새로 조직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0년 대구에서 로베르(김보록) 신부의 주선으로 명도회는 새로 조직되었고, 회장으로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대구 경제계의 지도자며 국채보상 애국운동을 일으킨 서상돈(아우구스티노)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드망즈 주교는 명도회를 교구의 가톨릭 액션단체로 육성하기로 결정하고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지난해 부활절부터 한 가톨릭 청년회가 ‘명도회’란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그 이름만을 존속시키기로 하고 그 회의 지도를 맡았다. 이제 새로운 체계가 완전히 그 구실을 다하고 있다”
- 1911년 9월 3일 일요일
시급한 사제 양성
남방교구의 관할 구역은 한반도의 1/3이 되는 넓은 지역에 포교대상 인구는 700만 명이 넘었는데, 포교인력은 외국인 선교사 15인과 방인 신부 5인 뿐이었다. 그랬기에 교구의 당면 과제는 ‘사제부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었고 방인사제 양성이 시급한 중요 사업이었다. 당장 신학교를 설립할 수도 없어서 용산신학교에서 두 교구의 신학생을 같이 교육하기로 주교들 사이에 합의가 되었고, 드망즈 주교는 부임 후 즉시 관하의 각 본당 신부들에게 신학생 후보자를 천거해줄 것을 권고하였다. 그래서 이 해 9월에 용산신학교에 입학케 할 후보자가 많이 보고되었다. 그러나 신학교의 시설이 부족하여 지원자를 다 수용할 수 없어 남방교구 지역의 지원자는 10여 명만 입학이 허가되고 나머지는 탈락되었다.
9월10일 입학이 허가된 남방교구 소신학생의 명단은 아래 표와 같다.
이름 출신지역 서품연도
이 마티아(이종필李鐘弼) 전북 되재본당 1922년 사제
이 요한(이경용李景涌) 경남 진주 비라실 1922년 사제
김 요한(김영제金永濟) 경남 울산 순정공소 1922년 사제
정 요셉(정수길鄭水吉) 경북 문경 용암면 1922년 사제
서 베르나르도(서정도徐廷道) 경북 대구본당 1923년 사제
이 안드레아(이필경李弼景) 경북 가실본당 1923년 사제
권 마르꼬(권영조權永兆) 경북 김천 마잠(공소) 1926년 사제
김 이냐시오(김구정金九鼎) 경북 대구 신암동 중퇴
송 아우구스티노 전북 진안 물곡리 중퇴
김 그레고리오 전북 익산 용암면 중퇴
한편 드망즈 주교는 9월 11일(월요일) 호남湖南 지방 첫 사목순방을 떠났는데, 그를 위해 8월 24일 제4호 회람을 발송했고, 9월 10일 사목방문을 위한 마지막 출발준비를 했다. 그리고 9월 11일 드망즈 주교는 주교복사(김 야고보)를 데리고 급행열차 편으로 여정에 올랐는데, 대구역에는 신부들과 많은 교우들이 전송했으며 대전大田역에는 되재升峙본당 베르몽(목睦) 신부를 대신하여 박요한(박준호朴準鎬)이 주교를 기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