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자원봉사 대학생들의 요구로, 한 사회단체에서 1박 2일에 걸친 교육을 급박하게 의뢰해왔습니다. 학생들과 주최 단체에서 요구한 내용을 다 아우르면서도 재미있게 배울 프로그램을 짜기 위해 저희 연구소에 계신 3명의 선생님들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급한 날짜에 맞춰 주최측과 선생님들은 각자 계획을 수정하며 준비를 철저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약속한 날 참가한 학생은 9명 뿐이었습니다. 14명으로 사람이 줄었어도 35명으로 예약되어 있는 수련원에는(선생님을 포함하여) 35명분의 숙식비를 지급해야만 했습니다. 돈을 많이 내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보다는 준비된 21인분의 식사가 그냥 남겨진 것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습니다. 수련원에서 비용을 조절해주셨지만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으면 그 수련원은 더 많은 인원의 다른 팀을 맞이할 수 있었고, 주최측은 더 아늑한 다른 장소를 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최측의 입장도 그랬겠지만 30명을 기준으로 프로그램을 준비한 저희 연구소의 입장도 참 난처했습니다. 강의, 집단, 여흥 그리고 거기서 일어날 여러 역동을 현장에서 바로 9명 기준으로 새롭게 바꾸어야 했습니다. 며칠 간 고심해 만든 프로그램이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도 아쉬웠지만, 즉흥적으로 짜는 프로그램이라 꽉 찬 내용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은 더 아쉬웠습니다. 게다가 애써 시간을 조정해 참가하신 강사들 중 한 분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참가한 9명은 약속을 성실히 이행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우리의 답답한 심정을 얘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필자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21명의 학생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피해를 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 학생들은 무슨 이유에서 참석을 못한 것일까? 사실 그들은 대부분 처음부터 참석할 생각이 없었거나 다른 계획과 겹쳐 확신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약속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참석 못한다고 했더라면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을 골탕먹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못 간다고 하면 주최측에서 실망할 것 같아, 즉 기대에 어긋나는 말을 하여 상대편이 실망한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에 걸려 예의상 참석하겠다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상대편의 실망한 모습을 보거나, 자신이 누군가의 기대에 어긋났다는 잠깐의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한 말이 더 긴 시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시간적·경제적·정신적 손실을 주고 만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IMF 때, 별 일 없을 것이라 믿고 보증을 섰다 평생 모은 재산을 날린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평을 들으며 본인은 남에게 부탁을 잘 하지 못하지만, 주위 사람의 부탁은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방이 느낄 것이라 예상되는 감정에 푹 빠져 만약의 경우 자신이 책임져야 할 부분에 대한 현실적 계산이 잘 되지 않을 뿐더러, 그 이해관계에 관해 구체적으로 물어볼 생각도 못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는 묻고 싶은 생각이 들어도 상대방이 실망하거나 난처한 입장에 놓일까봐 차마 묻지 못하고 ‘의리에 살자’ 등의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빨리 그 상황을 끝내고 맙니다. 만약 그 금액을 알았다고 해도 ‘나 같으면 책임지지 못할 일은 타인에게 부탁도 하지 않을 테니까’ 대신 갚아주는 일이 생길 것이라는 건 상상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일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공감으로 그들, 즉 타인을 그 순간 실망시키지 않으려 거절하지 못한 것이 결국에는 내 가족이나 나에게 피해를 주고 더 긴 시간 더 큰 실망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A부인은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습니다. 원래의 계획은 오전에 아들의 학교행사에 봉사하러 갔다가, 오는 길에 장을 봐 윗집 아줌마가 손님 치른다고 부탁한 음식 한 가지 준비해주고, 저녁 때 친정어머니께 들러보는 것이었습니다.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되었어도 바빴을 일정인데 아들의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못 본 체 할 수 없어 생각보다 훨씬 더 시간을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급히 장을 봐 윗집에 줄 음식을 마련하면서 며느리일로 속상해있는 친정어머니께 가야 할 일 때문에 마음 속으로 초조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다행히 저녁 때 어머니로부터 다음날 오라는 전화가 와서 일단 한숨을 놓는 중에 남편이 퇴근했습니다. A부인은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이다 긴장이 풀리니까 저녁도 대충 차리고 잠자리 준비를 남편에게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기꺼이 해주지 않는 남편의 모습에 짜증이 났고 결국 그 일로 다투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낮에는 도대체 무얼 하길래 나만 보면 부려먹지 못해 안달이야?” 하며 화를 냈습니다. A부인은 “남들한테는 항상 자상하면서 왜 나는 배려해 주지 않는 거야? 나는 낮 동안 아이들과 씨름하느라 한시도 쉬지 못 한단 말이야!” 라며 언성을 높이다가 남편과 등을 대고 누워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 했습니다.
B부인은 윗집 아이를 자주 보아주곤 합니다. 자신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며 때로 자신을 무시하기도 하는 윗집 부인이 밉고, 자신이 이용만 당하는 것 같아 억울해하면서도, 그 집 아이를 계속 보아주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합니다. 자기 주장 강하고 똑똑한 윗집 부인은 아파트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B부인은 항상 그 눈치를 보며 기분을 맞추려하고 윗집 부인이 자신에게 쌀쌀맞게 군 날은 다른 이웃들도 그런 것 같아 문 밖을 나서기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끊고 싶지만 자신의 복사판 같이 소극적이고 착하기만 한 어린 아들이 윗집 아들과 친구이고 이웃들도 다 아들 또래의 자녀들을 키우고 있기 때문에, 아들을 위해서라도 윗집 부인의 기분을 맞추어야 한다고 자신을 설득하여 다시 그 부인의 일을 더 열심히 돕고, 결과적으로는 더 무시당하는 악순환의 고리 속에 있습니다.
A부인과 B부인 모두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분들입니다. 정도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보다는 타인의 욕구를 우선하거나, 그것이 자신의 욕구로 변질되는 경향이 있다는 면에서는 뿌리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타인과의 갈등을 가장 싫어하여 마찰을 피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비교적 원만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한쪽이 자기 독자성을 무시하여 자기 힘을 절대 드러내지 않아야 합니다. 이들은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아첨과 복종, 자기비하적 경향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런 모습에 편안함과 이익을 느끼던 상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주도성과 자율성이 결핍된 이들의 모습에 싫증이나 부담을 느끼게 되어 점차 짜증 내거나 멀어지려 하고, 더 나쁜 경우 이들의 희생적 태도를 이용하거나 학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들은 자신의 헌신에 합당한 보답이 주어지지 않아 억울함과 분노를 느끼지만 그 감정까지도 억제하여 더욱 더 상대에게 굴복하며 사랑을 받아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상대는 바로 이런 모습에 진저리를 치며 더 멀리 떠나가거나 더욱 학대합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될수록 이들은 자신감을 상실하여,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지나치게 부담스럽고, 그러다보니 자신이 아무리 곤란해도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낙관주의자로 보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의 무능함과 부적절감으로 우울한 감정을 가지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착하고 유순해 보이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스스로 억압한 분노감이 자리잡고 있게 됩니다. 이런 분노감은 가장 가까운 배우자나 자녀들에게는 쉽게 표출되어 ‘밖에서는 착한 사람, 집에서는 이기적 폭군’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들이 이렇듯 자신의 주장을 못하는 이유는 타인으로부터 버림받아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리적 태도를 갖게 된 원인은 다양합니다. 흔히 어릴 적 허약한 체질 등의 영향으로, 혹은 부모 스스로의 걱정과 불안으로 아이를 과잉보호하며 지나치게 통제한 경우에 이런 경향이 나타납니다. 또는 부모에게 의존할 때는 칭찬하고 자율성을 가지고 독립하려 하면 은근히 거부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경우에도 나타납니다. 한편 한 아이가 유난히 유능하다든지 또는 공격성·자기 주장이 강하거나 말썽꾸러기일 경우 다른 형제는 반대로 소극적이며 고분고분한 성격을 발달시켜 이런 경향을 갖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격의 개별적인 원인은 성장과정을 돌아보며 체계적으로 심리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쉽게 찾아내 극복할 수 있지만, 보통의 경우 그 원인을 찾아 교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스스로에게 인식시키고 훈련해야 하는 것은 스스로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우선 대인관계에서 좀더 적극적이 되어보고, 혼자서 어떤 일을 추진해보고, 더 나아가 타인 앞에서 자신의 의사나 욕구를 분명히 표현하는 연습 등을 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만 혼자서 이런 과정을 밟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함께 추진해가며 계속적으로 심리적 지지를 해줄 전문 상담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독립심을 갖고 있어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누구도 필요하지 않는 상대가 제일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모든 인간은 타인에 대한 의존성을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이루어 사는 것이고 가족 안에서 더 의존하는 관계를 형성하며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쟁취해나가기 위한 몸부림으로서의 인간의 역사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처럼, 반면 모든 인간은 주위의 어떠한 간섭이나 명령, 위협이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건강한 성격이란 의존성과 독립심이 적당히 균형 잡혀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위에 든 사례를 보며 누구나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 것입니다. 다만 그 정도가 지나쳐서 위의 사례에서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다치게 한다든지 스스로 상처입는 정도라면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마음이 들고 소외당할 것이 두려울 지 모르지만 그것이 스스로의 독립심을 확고하게 만드는 길이고 원치 않는 피해를 주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교육에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이 경청하기라면 완성적으로 하는 것은 자아강화입니다. 부모로서 누구든 자신의 자녀가 의존적이고 수동적으로 자라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 스스로가 의존적인 사람이 자녀에게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강변한다면 결코 좋은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신은 고치지 못하면서 착하거나 무능해보이는 자녀에게 더욱 강해지라고 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오히려 자녀의 자신감에 손상을 주어 의존성을 더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자녀에게 어떤 모습이 되라고 강요해왔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당장 그만두고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부모가 변하는 만큼 자녀가 강해질 것이고 더 나아가 이 사회가 더 강해집니다.
정의롭고 살기 좋은 선진 사회는 ‘좋은 게 좋은 거야’라며 개성을 죽이고 잘못을 은폐하는 사회가 아니고, ‘나는 …한 사람이야’라고 주장할 수 있고 아닌 것에는 분명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누구의 힘에 의존하여 출세하려는 사람도 없고, 부모나 타인의 덕에 잘 살아보려는 사람도 없는, 다시 말해 스스로의 능력을 믿고 노력하여 그 결실을 따는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에 바로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충 적당하게 흐르는 대로 살지’라는 마음의 유혹에 ‘아니’라고 거절의 사인을 보내는 것으로 천국을 더욱 우리 가까이로 당겨보지 않으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