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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가 영글어가는 계절에는...
작은 삶, 아름다운 이야기·충북 영동군 매곡면 박관수(돈보스꼬) 씨


글│이순희 (아녜스)·대구대교구 사목국 홍보담당, 사진│김선자 (수산나)·본지기자

하얀 개망초꽃이 손바닥만한 논가에 소복히 피어서 제각기 더운 바람에 흔들리는 8월. 충북 영동군 매곡면에서 포도재배를 하는 박관수(돈보스꼬, 51) 씨는 1년 중 이 8월이 가장 힘들고 또 가장 행복하다.

포도알에 영글은 땀방울

박관수 씨가 사는 곳은 낮엔 덥고 밤엔 서늘한 고랭지 기후라 포도농사를 짓기에 제격이다.

24년 전 한창 젊은 혈기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나이에 그는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왔다. 이 곳에 살던 외가 식구들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그는 고스란히 그 농토들을 떠맡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포도 뿐만 아니라 벼농사는 물론 담배 농사도 지었는데 지금은 자신들이 먹고 살 만큼의 벼농사와 이 지역 기후에 적합한 포도농사에 온 정성을 쏟고 있다.

 

처음 포도를 재배했을 땐 농사에 대한 지식은 없고 열정만 있어서 뭐든 많이 주면 좋은 줄 알았다. 포도가 단맛이 적당히 나야 하는데 지나친 퇴비로 인해 당도가 너무 높아서 포도 알맹이가 수확하기도 전에 모두 터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첫해 농사는 결실도 못 보고 실패를 했다. 그러나 이제는 20년의 세월동안 몸으로 체험하며 익힌 산 지식으로 포도농사라면 좀 자신이 생긴다는 박관수 씨. 매년 8월 송이송이 까맣게 영글어 가는 포도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건실했는가를 말해준다.


새벽 4시30분. 그들은 습관처럼 일어나 모자를 눌러쓰고, 이슬도 채 걷히지 않은 들길을 지나 포도밭으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포도를 따느라 왠 종일 양팔을 들고 일을 하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성한 곳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아파서는 안될 사람처럼 또 해가 뜨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모자를 눌러쓰고 포도밭으로 향한다. 그들에게 포도는 단순히 포도가 아니다. 1년 동안 살아온 삶의 결실이기에 자신의 품을 떠나는 마지막까지 이렇게 애정으로 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여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그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포도농사는 사람이 짓는 게 아니라 하늘이 짓는 거요.”

그 만큼 포도농사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수확을 시작했을 때 하늘이 심술이라도 나서 비를 내린다면 그 해 수익의 절반이 땅에 고스란히 묻히게 된다. 작년엔 수확기 때 일주일 내내 비가 왔다.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그들은 어찌나 하늘이 무심했는지 모른다. 비에 젖은 포도를 따 선풍기에 말려서 상자에 담았는데도 손해가 막심했다. 이럴 땐 물질적 손익을 따지기 앞서 그는 그저 자신이 한 해 동안 포도에 정성을 쏟은 것이 무안해져 속상하기만 하다.


그래도 행복한 가정이 있기에

관수 씨와 그의 아내 안정림(루시아, 47) 씨는 24년 전, 처음 만나 약혼을 하고, 한달만에 결혼을 했다. 그 시대 사람들이 대부분 얼굴 한번 보고 결혼을 하긴 했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서로를 끌어 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는 듯했다. 관수 씨는 참하디 참한 루시아 씨를 처음 보고 ‘이 사람이 내 사람이 되면 참 좋겠구나’ 생각했다. ‘다행히’ 라는 말을 붙여 관수 씨는 “이 사람도 내가 맘에 들었나봐요.” 하며 웃음을 머금었다.

 

“조금 더 늦었으면 당신, 농촌 총각되어서 장가도 못 갈 뻔 했죠?”

“내가 아니면 당신도 결혼 못했을 걸?” 하며 서로 밉지 않은 세력다툼을 하는 듯하지만 그 표정 속엔 ‘우리 참 잘 만났지요’ 라는 모습이 숨어 있다.

 

얼마 전 아들의 교통사고로 루시아 씨가 3주 동안 병원에서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 때 관수 씨가 집안 살림을 도맡았는데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김치도 담그면서 그는 그의 아내 루시아 씨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 점심 상에 그가 담근 김치가 나왔는데 그의 실력도 만만치 않다. 이것은 김장 때 마다 아내를 도와 김치를 버무리며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

 

6~7년 전부터 그는 김장 때면 아내를 꼭꼭 도왔다. 루시아 씨가 양념을 만들어 두면 배추 숨 죽이는 것부터 양념 버무리기까지 모두 그가 한다. 루시아 씨가 저녁 밥을 준비하고 있으면 어느 새 다가와 마늘을 까고 있는 그다. 말은 않지만 루시아 씨는 그런 살가운 남편이 늘 고맙다.


내 삶의 주인은 주님

모든 사람에게 편안함을 안겨주는 관수 씨!

성당에서도 그가 하는 활동은 많다. 일을 하다가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전화가 오면 일손을 놓고 뛰어간다.

 

연령회 일을 하는 그는 시신을 깨끗이 씻을 때마다 새로 태어난 기분을 느낀다. 한 세상 살다가 조용히 가는 사람들을 보면 삶에 지쳐서 허덕이고 마음 졸이며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삶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한발 짝 물러 선 여유일 것이다. 사람이 때론 자신을 타인 보듯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여유 속에서만이 욕심과 욕망을 조금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염을 해 달라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면 거의 대부분이 암, 폐결핵, 간경화로 험하게 돌아가신 분들이다. 때론 소염을 하다 그의 손이 피범벅 될 때도 있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 꺼려하는 것이기에 주님이 주신 내 몫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하고 난 뒤 그에게 돌아오는 수고료는 담배 한 값, 소주 한 잔. 그러하기에 그가 계속 이 일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느님 믿으세요’ 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는 먼저 다른 이에게 하느님을 믿음으로 인해 생기는 용기와 사랑의 실천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가 봉사를 하면서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일 것이다. 이 사람이 하느님께 나아가기를… 그래서 이 좋은 것을 함께 누리며 살기를…


이 세상에 근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그는 그 근심을 늘 하느님이 내게 주시는 사랑표현이라 생각한다.

 

‘이 고통을 통해서 주님은 또 내게 무엇을 주시려하는가!’

그는 일터에서 포도밭 골을 넘어 다니며 곧잘 노래도 부르고 때로는 소리를 지르며 목청을 돋우기도 한다. 그래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곳엔 그가 어김없이 있다는 사실을 이 마을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저 사람 또 시작했구먼’ 하며 혀를 차지만 실상 사람들은 자유롭고 늘 기쁜 그의 모습을 부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충북 영동, 포도가 까맣게 익는 8월엔 어김없이 그의 노래 가락이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울려나고 있을 것이다. 해가 지면 그가 남긴 목소리는 새 소리, 풀벌레 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자연의 소리가 되어 그 산에 묻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