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으로 허기를 달래며 부랴부랴 후쿠오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가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엇이든지 재미있을 수 있다.’ 퍽이나 많은 27명의 새 신부들은 이번 여행을 마치고 나면, 다시 모여 함께 여행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형제들과 함께 한다는 생각, 일본에 간다는 생각, 성지순례를 한다는 생각, 무엇보다 대주교님과 함께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더욱 설레게 하였다. 후쿠오카에 도착한 우리는 우리나라와 똑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그 때 대주교님께서 “한국과 일본이 무엇이 다른지 한 번 살펴보라.”고 말씀하셨다.
‘너무나 친절한 사람들, 횡단보도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차를 멈추는 교양 있는 사람들, 계단을 오르다가 미끄러지지 말라고 노끈을 감아 놓은 배려 깊은 사람들.’ 그런데 문득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세심하도록 배려 깊은 사람들이 박해를 했다면 얼마나 극심하게 했을까? 실제로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박해는 신자들을 멸절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가꾸레이 기리시당이 모여사는 이끼즈끼 섬을 향했다. ‘가꾸레이 기리시당’은 ‘숨어서 살아온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250년 동안 신앙을 지켜온 이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교회와는 아주 다르게 변해갔다. 교회와 떨어지면서 변해버린 신앙, 우리는 그들의 선조가 지켜온 신앙의 흔적을 찾아 나선 것이다. 해안을 끼고 달리던 도중 ‘개미’ 혹은 ‘낙타섬’이라고 불리는 ‘나까요지마’라는 작은 섬을 보았다. 그곳은 많은 순교자들이 나온 곳인데, 조안이라는 순교자는 “이 섬에서 천국이 멀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비성당이라고 불리는 한 작은 성당을 찾아가던 중에 한국 신부들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거리를 정리하며 기쁘게 맞아주었다. 그들 대부분은 가꾸레이 기리시당이라고 한다. 이 나비성당은 가꾸레이 기리시당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의 큰 상징으로, 예전에 이곳에 부임한 본당 신부는 가꾸레이 기리시당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러한 노력 끝에 가꾸레이 기리시당인 한 할아버지는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믿어온 그 종교가 맞다고 확신하며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할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잔치집에서 떡을 먹다가 운명을 달리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이 할아버지가 교회를 나가면서 저주받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교회는 또다시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이 성당의 본당 신부는 가꾸레이 기리시당들이 다시 교회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취미를 살려 나비를 이용해 칠성사를 표현하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이 성당은 나비성당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런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나비성당에서 미사를 올리며 가꾸레이 기리시당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신앙이 교회와 떨어질 때 얼마나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인지, 또 한편으로는 가꾸레이 기리시당이 오랜 시간동안 선조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큰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왔는지를…. 250년 동안 박해를 받아오면서 가꾸레이 기리시당은 후미에라는 뼈저리게 가슴 아픈 상처를 받아야만 했었다. ‘후미에’는 기독교도인지 아닌지를 식별하기 위해 그리스도나 마리아 상을 새긴 널쪽을 밟고 지나가게 한 일인데, 매년 새해에 이것을 행했다고 한다. 엔도 슈우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 안에서도 이 후미에가 나타나는데, 이 상을 밟으면서 겪어야만 했던 피를 쏟는 듯한 아픔과 이것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때 밟아도 좋다고 목판 속의 그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은 바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배를 타고 오니노고 현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많은 신앙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우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곳에 신앙인들이 살아온 흔적들을 찾아 나섰다. 이곳저곳 한참을 헤매었지만 십자가하나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온통 불상과 이상한 신사들이 즐비해 있었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가까스로 도착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바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바위 위에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 작은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떤 것은 점 네 개로 십자가를 표시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찾고자 한 신앙인들의 무덤이었다.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이 무덤들을 보면서, 죽은 후에도 박해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 일행은 여기저기서 풀도 뽑아내면서 무덤 주위를 단정하게 꾸며보았다. 그리고 대주교님과 함께 이곳에 묻힌 신앙인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며 강복하였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에 묻힌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이 신앙인들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사제들이 이제야 찾아왔는데, 아무런 말이 없다. 아마도 하늘나라에서 기뻐하고 있겠지. 이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사실 일본에서는 아직도 박해가 끊이지 않은 것 같다. 가톨릭 성지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여러 불상들을 가져다 놓고 마치 신사처럼 꾸며놓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기도 했다. 신앙의 후손으로서 이들의 삶과 이들의 흔적들을 제대로 가꿔 두지 못함이 못내 죄송스럽고 아쉽기만 하다.
이토록 아름답고 울창한 산림들과 푸르디 푸른 바다는 순교자들의 피를 한껏 머금고 있다. 박해의 칼날은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아 갈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신앙과 믿음의 삶을 굴복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