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도보성지 순례에서 찍은 사진을 <빛>잡지에 전해주러 간 것이 인연이 돼 다시 독자체험 성지순례를 신청하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서울이고 또 짧은 시간에 많은 성지를 순례할 수 있어서 서울을 택하게 되었고, 새로운 순례의 방법으로 지하철을 이용한 도심권 순례라는 프로그램을 위한 사전 답사의 방법이기도 했다.
대봉성당의 똘만이(?) 둘과 같이 동대구역으로 향했으나 휴가철이라 좌석이 없었다. 우리는 발길을 돌려 버스터미널로 갔고, 거기서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전날 여름산간학교에 가서 불침번을 섰기에 좀 피곤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잠든 모습을 보며 나폴레옹(이 길이 아닌 게벼)은 되지 말아야 할텐데 라는 생각과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처음 하게 되는 “지하철 타고 성지 순례하기”의 서곡으로 우리는 지하철 4호선에 몸을 맡기고 숙소로 향했다.
첫째날
4호선 혜화역 (혜화동성당, 가톨릭대학교 내 옛 소신학교 자리) → 4호선 명동역 (명동성당) → 동대문 운동장역 (2호선 환승) → 2호선 합정역 (절두산 성지) → 6호선 삼각지역 (새남터성당)
우리는 드디어 첫 목적지인 혜화동을 향해서 4호선을 탔다. 혜화역에서 내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을 향해 가는 길에 동성 중·고등학교 앞을 지날 땐 잠시 까까머리 학창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총무과의 도움으로 옛 소신학교 건물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머리가 쭈삣거렸다.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이곳이 처음 순례지인데 앞으로의 사진은 어떻게 하나?). 결국 그 곳의 사진은 포기해야 했다. 명동성당으로 가는 길에 충무로에 들러 간단한 카메라 테스트를 하고 임시 방편으로 조절해가며 찍기로 했다. 모든 것은 주님께 책임을 전가한 채…
명동성당에 도착하니 성당 뒷편에서 농성중인 민주노총 때문인지 성당 주변의 검문이 심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하지만 경찰들도 산적 같이 위장한 나의 외모에 겁먹었는지 우리는 검문하지 않았다). 성당내부는 수리 중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에서 가톨릭의 대표적인 성당이라는 인지도가 새삼 느껴졌다.
이젠 절두산 성지로 가는 길. 명동역에서 출발, 동대문 운동장역에서 환승, 2호선을 타고 합정역으로 향했다. 절두산에서는 닥종이 인형으로 꾸며 놓은 순교선열들의 생활상을 전시하고 있었으나 전시시간이 지나 구경하지 못하고 지하에 모셔진 성인의 묘지도 참배하지 못했으나 주변에 새로 꾸며놓은 야외 제대는 참 인상 깊었고 현재 공사 중인 피정의 집이 완공되면 많은 신자들이 순교성지에서 신심을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현해탄 넘어 일본에서 순교한 오타 줄리아의 묘와 이바라끼 3부자의 기념상은 또 다른 순교의 장으로 순례시 꼭 잊지 말고 참배하였으면 한다.
우리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새남터로 향했다. 새남터로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위치한 일명 “노들” 혹은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던 곳으로 조선조 초부터 군사들의 연무장과 국사범國事犯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신유박해 때 중국인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치명당한 뒤 신유, 기해, 병오, 병인을 거치며 김대건 성인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성혈이 뿌려진 곳으로 지금은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건축물인 대성전의 웅장함에 새로운 감회를 받을 수 있었다.
대성전을 나오자 이미 날은 어둑해져 가고 우리는 용산역으로 가며 나폴레옹의 위대함에 다리품을 팔아야 했다. 아이고 다리야!
둘째날
4호선 동대문 운동장역 (광희문) → 5호선 서대문역 (서소문 순교지, 약현성당 (중림동성당)) → 공덕 (6호선 환승) → 삼각지역 (삼각지성당, 옛 용산신학교성당, 왜고개, 당고개) → 서울역 → 고속버스터미널
첫 목적지인 광희문에 도착했다. 하지만 광희문 어디에도 박해 당시의 순교자들의 시신이 버려졌던 곳이라는 안내문이 없어서 아쉬웠다.
안내문이 있었다면 지나가던 일반 시민들이 읽고 천주교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다시 5호선을 타고 서소문 순교지로 향했다. 서소문 성지는 이곳에서 순교하신 순교자 중 44분이 성인이 된 믿음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조 건물인 약현성당이 있어서 문화재적인 가치도 높아 현재 사적 제252호로 관리 중이다. 약현성당 이후 우리나라의 교회 건물의 모델이 이곳에서 출발하였다고 하니 신앙적인 모습이나 문화적인 모습에서도 꼭 들러보아야 할 성지라고 생각한다.
이제 다시 6호선을 타고 삼각지, 어제의 마지막이었던 새남터도 이곳에서 끝났는데 오늘도 이곳에서 끝내게 되었다. 옛 용산신학교로 가려면 성심여고를 찾아가야 한다(비신자들은 옛 신학교자리를 모르니까). 마침 방학이라 여고생들의 재잘거림은 들을 수 없었으나 옛 성당을 거쳐 불어오는 바람은 노老 신부님들의 어렸을 때의 활기찬 외침으로 들리는 듯 했다. 옛 신학교 자리를 떠나 달동네의 구불구불한 골목을 올라가며 이곳에 성지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새남터와 서소문 왜고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당고개 순교지가 있었다.
이곳은 아홉분의 성인이 탄생했고,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마리아)가 순교하신 곳이다. 당시 당고개는 죄인을 처형하던 곳은 아니었다. 일반신자들은 서소문에서 처형했고, 사제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새남터에서 처형했는데 설을 앞두고 장안에서 피를 보면 장사에 지장이 있다는 상인들의 요구 때문에 당고개에서 처형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고가차도와 기찻길, 상가건물에 가리워져 성지가 있으리라곤 생각하기 힘들었고 특히 4호선 종착역인 당고개역과 혼동할 수 있으니 주의하길 바란다. 우리는 예정됐던 순례를 마치고 서울역으로 향했으나 아뿔사 피서철이라 좌석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버스터미널로 향하며 마지막까지 지하철을 한 번 더 타보고 끝내라는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이해해야 하였다.
마지막으로 대구로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성지는 따로 떨어져 있어서 큰 맘먹고 가는 곳이 아니라 지하철을 타고 지나다 내리는 바로 우리 생활 속에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아울러 조금 아쉬웠던 것은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경기일원까지 지하철로 순례할 수 있었는데 못 가본 것이 아쉬웠고 묵묵히 성지순례에 함께 해준 대봉성당의 대들보 인호와 청년의 희망인 기범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