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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알’에 성화를 담아내는 ‘알그린자’ - 아뜨리에 ‘오로떼’(olote:our lives on the egg)
그리스도의 향기


글 | 여장은(레지나)·본지 위촉기자, 사진 | 김명수(안드레아)·스튜디오 예안

화 가, 음악가, 무용가, 작가… 자신의 의지와 사상과 사고를 여러 형태의 예술로 표현하는 사람들. 남들이 뭐라고 평가를 하든 그들에게는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끊임없이 추구하는 이상이 있다. 내적 갈등 속에서 만난 진정한 하느님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오수인(글라라) 님을 만난 것은 이미 가을이 성큼 다가와 옷깃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제법 서늘하게 느껴지는 오후였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참으로 어여쁘고 마치 오래 전에 알던 이웃집 언니처럼 시원시원하게 말을 잘 늘어놓는 오수인 님은 ‘알그린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은은한 불빛이 감도는 작지만  아늑하고 소담스런 화실로 들어서자 벽면에 가득한 액자 속 ‘알’들에는 여러 그림들이 정교하게 또 대담하게 담겨져 있었다. 벽 아래쪽에 자리한 아직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수북이 놓인 하얀 알들 또한 눈에 들어왔다.

 

  교회에서 가장 큰 축제인 부활절, 그 의미가 담긴 달걀에 그림을 그려 나누면서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기도 하고, 비신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복음을 전파하기도 한다. 오수인 님도 처음에 그렇게 알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활절을 맞아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이 담긴 알들을 주위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신자들은 모두 한번쯤 경험이 있을 테지만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삶은 부활달걀이건 삶지 않은 부활달걀이건 내용물이 상하기도 하고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기 마련이다. 그러면 선물한 사람의 정성으로 어우러진 달걀을 처치(?)해야 하는 난감한 지경에 이르는데. 오수인 님으로부터 부활달걀을 선물받은 분들 중 참으로 아깝다며 오래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그에게 전해졌다. 그래서 달걀의 내용물을 다 빼내고 깨끗이 씻은 후 잘 말려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고 액자에도 넣어 하나의 작품으로의 알그림을 그린 지도 5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캔버스에 하나 가득 담길 만한 한 폭의 그림을 직경 10cm도 되지 않는 작은 알에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막상 그림을 그리고 보니 제법 ‘그림’같았다. 자신이 그리고도 신기하게 보이고 또 한 알 한 알에 정성으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예전에 그리던 유화보다 진행이며 완성속도도 빨라 한층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고. “하루 한 작품에서 빠르면 열 작품까지도 완성해 보았어요.” 오수인 님의 얼굴에 나타난, 이미 삶의 일부분인 그림에 대한 열정은 사그러들지 않을 것 같은 불꽃이었다.


오수인 님은 성모당 옆 남산성당 정문 맞은 편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 아침 저녁으로 친구들과 성모당을 제집 드나들 듯했지만 직접적으로 성당에 다닐 계기가 없어서 결혼 후 영세를 받았다. 성모당을 드나들던 그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과 남다른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교내 미술대회에 나가 입상을 했다. 이후로 교내외로 미술대회만 열리면 대표로 선발되어 상을 탔었고 여태 당연히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그저 생활 속에서 그림을 좋아하고 그리는, 그야말로 타고난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닌가. 그림이며 바느질 등 손재주가 뛰어난 어머니와 남다른 글재주가 있으셨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오수인 님은 그런 부모님의 재주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며 미소를 짓는다.


결혼 후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었고 이후 주로 유화를 그렸다. 항상 행복할 것 같고 좋은 일들만 가득할 것 같았던 미래였지만 현실로 다가선 과거의 미래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귀국 후,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서울에서 미술학원을 열었다. 어느 날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미술학원이 있는 건물이 부도가 난 것이다. 보증금도 못 받고 물건 하나 건지지 못했다.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학원에는 학생들이 하나 둘 끊겼다. 충격과 절망으로 가득 찬 그때. 세례를 받고 난 후 절실하게 성서를 대하게 된 것은 바로 그때다.

 

  보통 이런 시련이 닥치면 사람들은 으레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냐고 하느님께 원망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원망은 시간낭비일 뿐이다. 한두 번은 누구나 겪음직한 시련은 바로 삶의 방향을 재점검하라는 하느님의 메시지가 아닐까. 오수인 님은 그저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주님께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밥 먹는 것도 잊고 밤낮으로 성서를 붙들고 필사를 하는 동안 문득문득 떠오르는 느낌이 있어 한 장면 한 장면 스케치를 하게 되었다. 그 느낌으로 하나 둘 그리기 시작한 성화를 91년, 구미문화전시회관에서 전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성화로, 교회 건축물의 창문 장식인 ‘스테인드 글라스’를 직접 그리기도 했다. 실제의 붓터치가 살아나도록 유리에 그림을 그려버리는 오수인 님의 그림을 보면 섬세하고 여성스런 느낌이 든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성화가 그려진 유리를 필름 형태로 만들어 제작한 ‘카드’를 만들었다. 아직 마땅히 기회가 닿지 않아 많은 이들에게 알릴 수 없었지만 이번 성탄을 계기로 여러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카드를 알려 볼 생각이다. 이런 성화를 그리는 오수인 님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그의 그림에 감화를 받아 ‘신앙 상담’을 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 말주변이 없어 당황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데.

  “성서를 읽는 것이 좋았고 쓰는 것이 좋았고 기도하는 것이 좋았어요. 남들보다 특별히 신심이 두터워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닌데, 제가 그린 성화를 보고 남들이 그렇게 오해를 해서 부담스럽기도 했고 성화를 계속 그려도 되는지 의문도 들었어요. 그런데 알에 성화를 그리니 주위에서도 그저 예쁘게 봐 주고 저도 부담스러움을 덜게 되어 한층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어요.”


지금은 성화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그림들을 작은 알에 표현한다. 알에 그릴 수 있는 그림은 한정되어 있지 않다. 민화, 성화, 추상화 등등. 알그림을 그리는데 재료나 방법에 있어서도 남다른 노하우가 생겼다. 민화를 그릴 때 사용하는 물감으로 성화를 그리게 되면 왠지 그림에 힘이 없어 보이고 색이 바랜 듯한 느낌도 든다. 유화로 알에 그림을 그리면 마른 후 유화가 툭툭 떨어져 버린다. 하지만 유화 같은 투박한 느낌이 들도록 이런 저런 재료를 섞어 그 질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오수인 님의 알그림들을 보고 배우고 싶어 찾아든 사람들도 늘어났다. 일주일 내내 화실에 오는 것은 아니고 일주일에 몇 번 그렇게 그림을 배우고 함께 작업을 한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재미삼아 한번 그려보라고 하면 잘 그리던 사람도 막상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면 겁부터 먹고 어려워하더라구요.”

 

  알그림이 가득하게 메워진 진열장에는 알그림을 배웠던 사람들의 흔적이, 남은 기억의 조각들이 남아 있었다. 특별히 그림에 소질있는 사람들이 모여 커다란 캔버스의 그림을 작은 알에다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여쭈니 “알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저 하고자 하는 성의, 관심, 시간의 투자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내가 관심만 있으면, 소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그리면 돼요. 사람마다 저마다의 장점들이 그림에 드러납니다. 섬세하게, 꼼꼼하게 때로는 대담하게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작품’이 나온 답니다.” 알그림은 큰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시간상 빨리 완성되므로 그만큼 성취감을 빨리 느끼게 된다고 한다.

 

  무슨 일을 하든,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연주를 하든 일단 예술가의 작품으로 남들에게 비춰지면 여러 평가들이 내려지게 된다. 많은 비판들이 쏟아질 때 자신의 의지를 꺾고 꿈을 접어버리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오수인 님은 그런 비판들이 오히려 채찍질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림을 포기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제껏 살아오면서 남들의 시선 때문에 하고자 하는 일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오수인 님. 새로운 장르의 그림을 그려 온 그 삶의 여정은 화실 여기저기에 증거물처럼 남아있었다.


오수인 님에게는 그림보다도 소중한 보물이 둘 있다. 바로 딸(이좋은, 보나, 17), 아들(이모든, 보나벤뚜라, 15)이다. 알그림과 성화를 그리느라 밤을 지샌 적도 많고 그래서 아이들의 도시락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적도 많았다. “어머니께서 건강을 좀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어느새 훌쩍 커버린 모든이는 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는 어머니 자신보다도 어머니를 챙기며 가끔은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핑 돌 만큼 대견스런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데. 남편의 빈 자리를 메워 가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꿰뚫기나 하듯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그저 미안할 뿐이다. 빨래며 설거지, 식사 준비까지 어머니의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솔선수범하는 모든이가 그저 대견스럽고 가끔 출장을 갈 때 엄마 대신 동생을 보살피는 좋은이가 고마울 따름이다. 이름만큼이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으로 컸으면 하는 바람으로 항상 기도를 드린다.

 

  작년, 월드컵을 겨냥하여 대구시에서 주최한 작품 공모전에서 오수인 님의 알그림은 당당히 입상을 하여 예술적 가치도 높게 인정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층에서는 그런 그에게 정통성을 고수하지 않는 ‘상업적 작가’라고 일축시켜 버리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조금은 섭섭함도 있고 세상의 시각이 모든 면에서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품어보았지만 지금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하면 그런 판단은 여전히 뒷전이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이 알그림을, 이 스테인드 글라스 작업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지기를 바랄 뿐이다.

 

  “두꺼운 책도, 아름답고 웅장한 성화도 아니지만 달걀 속에는 작고 연약하지만 껍질을 깨고 태어나는 생명이 있듯이, 달걀성화에는 힘차게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의 꿈과 희망이 담겨 있어요.” 매일 깨어지는 달걀이지만 그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를 바라는 그 바람이 이 땅에 깊이 내려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알그린자 오수인 님. 그에게는 끊임없는 기도 속에서 만난 분들과 자신을 지켜주고 또 바라보는 두 자녀가 있기에 결코 넘어질 수 없는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www.olot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