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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으로 통하는 작은 길- 성녀 소화 데레사(1873. 1. 2~1897. 9. 30, 축일:10. 1)
그대 사랑하기에


정재성(요한) | 신부, 대구대교구 봉덕동성당 보좌

이 번 호에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과 함께 ‘선교의 주보성인’으로 꼽히는 ‘소화 데레사 성녀’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대 데레사’로 불리는 데 비해, 소화 데레사 성녀는 ‘리지외(Lisieux)의 데레사 성녀’, ‘아기 예수와 성면(聖面)의 데레사 성녀’라고도 불리기도 하는데, 우리 나라뿐만 전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2년 반 동안의 유학생활 중 마지막 1년을 이 성녀에 대해 연구하고 석사학위논문을 썼다. 논문제목은 <리지외의 데레사에 의해 제안된 교회의 신비>인데, 언젠가 시간이 되면 논문내용과 다른 자료들을 중심으로 해서 책으로 발간할 생각이다. 그러면 이 성녀에 대해 공부하게 된 동기와 함께 성녀의 생애와 영성에 대해 말해보겠다.

 

  1997년 성탄 방학 때 교구사제 모임(2년에 한 번씩 개최되고, 대주교님께서 함께 참여하시는 모임)이 헝가리에서 열렸다. 그 당시 나보다 먼저 유학생활을 시작하신 선배 신부님들 중 영성신학을 전공하고 계신 김준년 신부님(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전공)과 손군옥 신부님(십자가의 성 요한 전공)께 조언을 구하였고, 소화 데레사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겨우 24년밖에 살지 못했고 또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던 소화 데레사 수녀가 어떻게 성녀뿐만 아니라 교회박사까지 될 수 있었는지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녀의 가족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상처와 치유

시계 보석상(1850~1870)이었던 루이 마르땡(Louis Martin:1823. 8. 22~1894. 6. 29)과 레이스 제조직공이었던 젤리 게렝(Z럏ie Gu럕in:1831. 12. 23~1877. 8. 28)은 1858년 7월 13일에 결혼하여, 17년 동안 9명의 자녀(딸 7명, 아들 2명)를 낳았는데, 4명은 어린 나이에 죽었고 5명이 살아남았다(마리(Marie:1860. 2. 22~1940. 1. 19), 뽈린(Pauline:1861. 9. 7~1951. 7. 28), 레오니(L럒nie:1863. 6. 3~1941. 6. 16), 셀린(C럏ine:1869. 4. 28~1959. 2. 25), 데레사(Th럕뢵e:1873. 1. 2~1897. 9. 30)). 이 딸들은 단 한 명도 결혼하지 않고 모두 수도자가 되었다(셋째딸 레오니는 프랑스 북부도시 깽(Caen)의 성모방문회(Visitation)에 입회). 데레사의 가족은 하루일과를 새벽 5시 30분 미사로부터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로서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것은 부모님 모두 수도자가 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혼했으므로 자녀들의 종교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가족의 막내로 태어난 데레사의 생애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알랑송(Alen뛬n)에서의 시기(1873~1877), 뷔쏘네(Buissonnets)에서 리지외까지의 시기(1877~1888), 리지외의 가르멜(Carmel)수녀원에서의 시기(1888~1897)이다.

 

  데레사는 1873년 1월 2일 프랑스 북부 알랑송에서 태어나, 이틀 후 첫째 언니 마리를 대모로 알랑송의 성모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엄마가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서말레’(Semall?에 있는 유모 ‘로즈 따이예(Rose Taill?’가 1873년 3월부터 1874년 4월 2일까지 데레사를 양육하였고, 그 이후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1877년 8월 28일, 엄마 젤리가 유방암으로 돌아가시자, 데레사는 두 번째 엄마로 둘째 언니 뽈린을 선택하였는데, 그때부터 활달하고 발랄하던 성격이 완전히 뒤바뀌어 끊임없는 신경증과 눈물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를 잃고 낯선 곳으로 이사간 데레사는 뷔쏘네에서 리지외까지의 시기(1877~1888)를 보냈다. 데레사는 4살 반의 나이에 엄마를 잃어버린 우울함을 간직한 채, 1881년 10월 3일부터 1885년까지 리지외에 있는 분도수녀원 소속 여학교의 반기숙생으로 생활했는데, 이는 데레사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슬펐던 다섯 해였다.

 

  1882년 10월 2일, 두 번째 엄마였던 뽈린은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예수의 아녜스 수녀)했다. 뽈린의 착복식인 1883년 3월 13일, 데레사는 이별의 큰 상처 때문에 중병을 얻어 죽음 직전에 이르렀지만, 5월 13일 성모 마리아의 미소로 완치되었다. 1884년 5월 8일 첫 영성체를 했고, 1886년 2월 초등학교 중퇴 후 1주에 3~4회씩 사설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중 10월 15일 첫째 언니이자 세 번째 엄마였던 ‘마리’마저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성심의 마리아 수녀)하자, 1885년 5월부터 시작되었던 ‘세심증’이 악화되었다.

 

  1886년 성탄날 밤에 치유의 은총을 경험(일명 ‘소화 데레사의 회심’)한 데레사는 어머니의 죽음 후 9년 여 동안 괴로워하며 잃었던 힘을 되찾게 되었고, 그 후로 다시는 잃지 않았다. 마침내 가르멜수녀원 입회를 결심한 데레사는 1887년 5월 29일, 아버지께 허락받았지만 성소에 대한 굳은 확신이 없었다. 마침 그때 3명의 여자를 살해한 프란지니(H. Pranzini)에 관한 기사를 <라 크롸(La Croix:가톨릭신문)>에서 읽은 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그가 회개하고 자신의 가르멜 성소가 이루어지기를 하느님께 간구하였다. 결국 죽기 직전 프란지니는 사제를 청하여 십자가에 세 번이나 입맞추었고, 데레사는 사형수의 회개를 얻어낸 동시에 가르멜 성소를 확신하였다.


작은 길, 언제나 어린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아기 예수와 성면(聖面)의 데레사 수녀)한 1888년 4월 9일, 데레사는 “나는 영혼을 구하려고, 특히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려고 가르멜에 왔습니다”고 했으며, 착복식(1889. 1. 10), 허원(1890. 9. 8)과 공적 착복예식(9. 24)을 받았다. 1893년 2월 20일 예수의 아녜스 수녀(뽈린)가 수녀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1894년 6월 29일에 아버지가 운명하자, 9월 14일에 셋째딸 셀린도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하였다(성면(聖面)의 즈느비에브 수녀). 이로써 한 가정 출신의 4명의 수녀가 한 수녀원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데레사의 영성이 확립되는 데 획기적인 도움을 주었던 사건이 바로 ‘셀린의 입회’였는데, 이는 셀린의 지참물(사진기, 시편주해서 등) 때문이었다.

 

  그해 겨울, 데레사는 순명에 의해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작은 길’(영적 어린이의 길)을 발견하였으며, 1895년 6월 9일 삼위일체대축일 미사에서 자비로우신 사랑에 자신을 봉헌하였다. 8월 15일 사촌언니 마리 게렝(Marie Gu럕in:1870. 8. 22~1905. 4. 14)도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성체의 마리아 수녀)하였다. 1896년 3월 21일 수녀원장으로 선출된 ‘공자그의 마리(Marie de Gonzague)’ 수녀는 5명의 수련자들을 보조 수련장인 데레사에게 맡겼고, 데레사는 ‘작은 길’로써 그들을 지도하였다.

 

  그해 성 목요일과 성 금요일, 결핵 때문에 두 번이나 각혈했던 데레사는 1897년 9월 30일, “나는 죽지 않습니다. 나는 생명 안으로 들어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만 1년 뒤인 1898년 9월 30일, 자서전 <한 영혼의 역사>가 출판(2,000부)되었고, 데레사의 무덤을 순례(1899년부터 허가)한 사람들에게 무수한 기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데레사는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1923. 4. 29), 시성(1925. 5. 17)되었으며,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선교의 수호성인’으로(1927. 12. 14), 비오 12세에 의해 성녀 쟌다르크와 함께 ‘프랑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1944. 5. 3)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6월 2일 리지외를 순례하였고, 성녀 소화 데레사 서거 100주년(1997년 9월 30일)을 기념하여, 1997년 10월 19일에 성녀를 서른세 번째 교회박사로 선포하였다.


  데레사는, 성인의 길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라는 단순하고 확실한 진리를 삶으로 증명하였으며, 사제들의 성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남들이 싫어하는 일들을 기꺼이 자청하였다. 데레사의 소명은 자신이 하느님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었고, 자신이 발견했던 ‘작은 길’은 모든 이를 위한 성성(聖性)의 길이기에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신자들, 심지아 무신론자들까지도 성녀를 공경하고 있다. 우리도 데레사 성녀를 본받아 하느님 앞에서 작은 채로 남아 있고, 점점 더 그렇게 되길 원하며, 그분의 사랑을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