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박준호 교사
1911년 9월 11일(월요일), 경부선 철도에 위치한 대전(大田=한밭)역에서 드망즈(안) 주교의 도착을 기다리던 사람들 중 박준호(朴準鎬, 요한)란 이가 있었다. 그는 1884년생으로 충남 놀미(論山)에서 태어났으며, 전라북도 고산(高山) 되재(升峙)성당에서 경영하는 <태극계명(太極啓明)학교>의 책임교사로서 베르몽(J. Bermond, 睦世榮) 신부를 대신하여 주교의 되재성당 방문 영접을 위해 대전까지 마중나왔던 것이었다. 그는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를 졸업하고 1908년 <태극계명학교>의 교사로 임명되었는데, 이 학교는 일반 보통교육 외에 당시 사회가 요구하던 실업교육(측량(測量) 강습소)부를 병설하여 그 교육도 함께 실시하고 있었다.
그 후 그는 관직에 몸담았다가, 1922년 서울교구에서 <남대문상업학교>를 인수할 때 교장으로 임명되자 관직을 사임했다. 그리고나서 <남대문상업학교>를 혜화동으로 옮겨 <동성(東星)상업학교>로 교명(校名)을 바꾼 후 ‘상업학교 을조(乙組)’라 하여 소신학교를 병설하여 신학생을 양성하였고, 또 종현(명동)에 있는 <계성(啓星)보통학교>의 교장을 겸임하였다. 1930년에는 종현주교좌성당의 연합청년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31년에는 프랑스 한림원(翰林院, Academie)으로부터 명예고등한림학사(翰林學士)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구의 서씨(徐氏) 집안과 깊은 인연을 맺어 여동생 박수산나는 서상돈(徐相燉)의 셋째 자부(서병주(徐丙柱)의 부인)가 되어 성서학자로 이름난 서인석 신부의 조모가 되었고, 또 서상돈의 손녀(서병조(徐丙朝의 장녀)를 자부(아들 박병래(朴秉來)의 첫부인)로 맞아들였다. 이런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36년 9월 16일, 향년 53세로 지병인 위암이 그 원인이었다.
고산 되재성당
‘고산 되재’라 했던 전라북도 완주(完州)군 화산(華山)면 되재리성당은 호남지방에서 가장 오랜 본당이며, 신교자유 여명기 때 설정된 지방교회의 중심지로서 전주(全州) 대성동(大成洞)과 금구(金溝=金堤), 배재(梨峙)와 함께 호남교회 발상의 3대 원류(源流) 중 하나인 곳이다.
‘교회의 은둔시대’를 말해주는 표상이기도 한 되재성당은 서울의 약현(藥峴=중림동(中林洞))성당 다음으로 시골에서는 먼저 세워진 성당이다. 1893년 ‘차돌박’에 거처하면서 전교하던 비에모(P. Villemot, 우일모(禹一模)) 신부가 본당을 이곳으로 옮기고 성당과 신부사택 건축공사를 시작하였는데 1894(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으로 몇 개월 동안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1895년 준공되어 뮈텔(민) 주교의 집전으로 헌당(獻堂)되었고, 성당의 수호성인은 성베드로와 성바울로 사도로 정하였다.
1784년 ‘조선천주성교회’가 설립된 후 1세기가 넘도록 순교자들의 선혈(鮮血)로 이 강토를 물들게 했던 박해가 예닐곱 차례나 거듭되면서 신자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읍내나 평야지대에 살지 못하고 피난 겸 산협지대에서 은거했기 때문에 되재와 같은 두메산골 벽촌이 초대교회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1898년 비에모 신부는 서울로 전임되고 제2대 본당신부로 미알롱(A. Mialon, 孟錫浩) 신부가 부임했다가 1905년 정읍(井邑)으로 전임되고, 제3대 본당신부로 베르몽 신부가 부임하여 1906년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1910년 당시 고산 되재성당 교세는 소속공소 23개처 신자총수 1,161명이다.
산길 40리 두메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의 연결지점인 대전역에서 하차한 드망즈 주교 일행은 (당시 대전시내에 본당이 없어) 일본인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9월 12일(화요일) 12시 30분 호남선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오후 2시 10분 연산(連山)역에서 하차하였는데, 당시 호남선 철도는 목포(木浦)까지 완공되지 못하고 연산까지만 운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전날 저녁부터 몰아친 비바람은 이날도 개이지 않아 연산역에서 나선 주교 일행은 우중에 말을 타고 상당히 힘든 하천을 건너 40리 길을 갔는데 교우들이 횃불을 들고 되재에서 10리 떨어진 곳에까지 마중나왔다. 본당은 불이 켜져 있었고 해질 무렵에 비는 그쳤던 것이다. 나바위(羅岩)에서 주교를 맞이하려 되재에 온 부주교 베르모레르(J. Vermorel, 장약슬(張若瑟)) 신부와 이 본당 주임 베르몽 신부는 이날 온종일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9월 13일(수요일) 아침에 주교 장엄미사를 드렸는데 약 400명이 성체배령을 하였으며 오후에는 주교강론과 견진성사 받을 사람들의 찰고(시험)가 있었다. 9월 14일(목요일) 주교는 아침 저녁 교우들에게 강론을 하였으며 본당에 비치된 모든 기록부와 문서를 살피고 본당 신부와 이야기함으로써 본당과 지방의 사정을 상세하게 청취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베르모레르 신부는 이날 오후에 나바위로 떠났다.
9월 15일(금요일) 되재성당 순시의 마지막날인 이날, 주교는 각 본당 신부들이 교구에 보내는 보고서들과 본당에 비치할 문서를 쉽게 정리할 수 있도록 모든 기록부를 교구에서 제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9월 16일(토요일) 드망즈 주교와 주교복사는 되재를 출발하여 나바위로 갔는데, 되재본당의 베르몽 신부가 동행하였고 그 동안 그치지 않았던 비가 다행히도 멎었다. 나바위에 이르자 되재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환영은 대단하였다.
뒷이야기
8·15 해방 후 사람들이 도시로만 몰려드는 추세에 따라, 많은 신자들이 본당을 고산읍(완주군 고산 읍내리(邑內里))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50여 년 간 순교자 후손들의 삶과 믿음의 중심이었고, 1944년까지 전주교구의 큰 본당 중에 몇 번째로 꼽히던 큰 성당이었으며, 겨레의 계몽과 개화의 기수 역할을 하였던 되재성당은 산골공소로 전락하고 유서 깊은 성당 건물마저 6·25 전란 때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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