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임신했어요. 월경을 안 한 지도 4개월이 지났어요. 4개월 정도면 50만 원이 필요하대요. 그런데 저희한테 그런 큰 돈은 없구요. 부모님들이 아시면 그 친구는 살아남지도 못해요….”
“전 대인 관계가 고민이에요. 남과 거의 어울리지 못하죠. 남들이 모여서 무슨 얘기라도 하면 꼭 제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예전 보단 많이 나아졌죠. 저는 고등학교 때 왕따를 당했는데 그 이후 그래요.”
“저는 청주에 사는 중학교 2학년입니다. 아빠가 저를 심하게 때려요. 견딜 수가 없어요. 죽고만 싶어요. 어떡하지요…?”
이상은 필자가 청소년들을 통해 상담 요청을 받는 여러 종류 중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외에도 성폭행에 대한 고민이나 동성애에 대한 고민을 너무나 진솔하게 또 충격적으로 고백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청소년들이 이런 극단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정도의 차이로 나타날 뿐, 거의 모든 청소년들이 비슷한 고민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청소년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해결하는가? 국가에서 운영하는 기관과 사설 상담단체들이 많이 있지만 이들의 문제를 소화해내기는 역부족인 듯하다. 개인적인 상담활동을 하고 있는 필자의 상담 건수만도 한 달에 무려 30여 건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청소년 단체가 맡고 있는 상담은 그 건수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그만큼 문제가 많은 아이들인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가 만나본 소위 기성세대들이 말하는 ‘문제아’들은 사회가 그들을 문제아라고 이야기할 뿐 전혀 문제아들이 아니었다. 단지 어른이 되는 과정을 조금은 혹독히 치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기 위한 정보가 너무나 무지하기에 때때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거나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고민이나 상처를 들어보면 필자의 마음을 참으로 안타깝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청소년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청소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문제는 청소년들과의 문제와는 그 성격부터 다르다. 어른들은 문제 해결을 스스로 할 수 있지만 청소년들은 대부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하는 중2 여학생을 상담하며 아이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아버지에게 무조건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라고 가르치겠는가, 아니면 집을 뛰쳐나오라고 말해주겠는가? 왕따를 당하는 학생에게 “담임 선생님께 잘 돌봐달라고 말을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학교를 다녀라”라고 말하면 그 학생에게 걱정이 사라지겠는가?
청소년들은 학교나 가정이라는 보호 아닌 보호의 틀 속에서 스스로의 문제 해결 능력을 전혀 키우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어른들은 청소년들의 문제 해결을 바르게 해주고 있는가? 한번은 임신한 지 3개월 된 고2 여학생을 만나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부모와 학교에는 임신 사실을 숨긴 채 7개월까지 간신히 버텼다. 하지만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부모에게 알렸고, 부모는 그것을 수치로 여겨 그 다음날 병원에서 수술을 시키고, 그날 이후로 그 아이에겐 외출금지령이 내려졌다.
이런 문제를 볼 때 부모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이는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다. 훗날 그 아이가 자신을 그렇게 도와준 부모에게 감사하겠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부모의 행동은 그 학생에게 자신의 행동이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수치였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그 학생의 행동은 성(性)에 대한 무지가 불러온 큰 상처였지만, 부모가 ‘장래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신의 행동을 수치라고 여기게 하고 뱃속에 있는 생명을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이는 모습을 보며 당사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성장하겠는가?
우리는 청소년들의 문제를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 단지 그들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조금 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겪고 있는 고민을 그들에게 ‘문제’라고 하면서 수치심을 줄 것인가, 아니면 ‘네 옆에는 우리가 있어’라고 격려하며 편하게 해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학부모들을 상담하다 보면 “우리 아이는 너무너무 착해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많이 듣는 말이 “우리 아이를 저는 믿어요”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말처럼 무책임한 거짓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아이들은 착하지만 부모들이 이런 표현을 쓸 때는 “나는 우리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어요”라는 말과 같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에 대해 전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부를 모르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특히 가정에서 “그것은 안 돼”라는 가치관을 무의식 속에서 익혀 왔던 아이들은 절대로 자신의 문제를 부모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부모가 자신을 또 정죄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설사 잘못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잘못했다고, 죄가 있다고 단정해 버리면 부모라고 할지라도 그 관계는 끊어져 버리고 만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가 강의를 가면 그곳 청소년 사역자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청소년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필자는 마땅히 해줄 말이 없다. 그 이유는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까”를, 필자는 한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그 자체가 좋은 것이지 달리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특별히 하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간혹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필자에게 다시 친근감을 표현하곤 했다.
우리가 청소년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를 따라하고 그들이 쓰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들이 그런 어른들을 청소년과 동일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눈에도 어른은 어른으로 보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나는 너와 함께하고 싶다(나는 너의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용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마음이 전달되고 있는가”이다. 이제는 청소년들을 이해하기 위해 나에게는 안 맞는 문화를 걸치지 말고 청소년들 자체를 좋아하도록 하자. 그렇게 되면 청소년들이 먼저 다가올 것이다. 부모의 역할도 이와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다음은 청소년들을 미리 용납하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아무리 잘해도 어른들의 기준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청소년들이 잘하면 잘하는 만큼 어른들의 기준도 올라가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청소년들 앞에서 마치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신화를 깨버릴 때 청소년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청소년들의 발달단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발달 단계는 육체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정서적인 면이 더 중요하다. 청소년들의 심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부모의 관심이 많으면 간섭이 심하다고 짜증, 관심이 적으면 무관심하다고 짜증을 부린다. 그리고 간혹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들이 부모에게 반항을 한다고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필자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자녀는 지금 너무나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고 있다”고 말이다. 청소년 시기에 건강한 반항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나중에 반드시 좋지 않은 모습으로 표면화된다. 그렇게 되면 쓴뿌리로 인해 많은 아픔을 겪으며 부모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필자는 본 글의 제목을 “기는 아이들”이라는 말과 함께 “저 혼자는 못 해요”라는 부제를 달았다. 그 뜻은 청소년 사역은 필자 혼자서는 할 수가 없다라는 말이다. 또 특별한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좋아하며 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약간의 배려만 하면 우리의 청소년들이 그만큼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홍진표 | ‘청소년 119대장’ 홍진표 목사님(34, dasombc@hanmail.net)은 현재 강서고등학교 교목으로, 10년째 아이들의 고민을 나누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고민 상담은 탁상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학교와 청소년쉼터에서부터 만화방, PC방, 비디오방, 노래방 등등 청소년들이 있는 곳이라면, 상처로 아파하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출동’해서 그들과 함께 합니다. 비를 맞고 있는 아이들에게 때론 우산을 받쳐주며, 때론 함께 맞아가면서요. 한때는 모두 아이였던 불안한 어른의 눈이 아닌, 아이 그 자체의 마음으로 세상을 느끼고 이해하며 홍 목사님은 오늘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