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년 전부터 우리 연구소에서 매년 실시하던 청소년 자아강화캠프는 올 여름방학에 19회째를 맞이했습니다. 그 동안 연구소에서는 우리의 캠프가 참가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어 그들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는 확신을 갖고 진행해왔습니다. 늘상 캠프 초반에는 참가자들이 서로 서먹서먹하여 어색한 분위기로 얼마간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구성원에 따라 시간의 차이가 있긴 해도 얼마 안 가서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깊이 있고 따뜻한 친구관계와 가족관계에 대한 욕구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고, 캠프가 진행되면서 그러한 관계맺음을 위한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을 훈련· 시도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참가자들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진행자로서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난해, 또 그 지난해에 캠프에서 보아왔던 청소년들의 풋풋하고 행복한 웃음을 꿈꾸며 캠프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첫째날부터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아이들이 배정된 숙소에서 잠자리를 살피기 시작할 때, 여느 때와 같이 선생님들은 하루 동안의 프로그램 진행상황에 대한 점검과 다음 날의 진행 전반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때쯤이면 아이들에게서 감지했을 변화의 조짐으로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야 할 선생님들이 미소는커녕 어쩌면 좋을지 모를 난감함으로 어두워 있었습니다. 차라리 울고 싶은 표정이었다고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 선생님들은 캠프가 이렇게 난감하고 힘든 이유를 알기 위해 참가한 학생들 개별적 접촉에 대한 경험을 검토하고 밤새도록 고민하며 토론을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지난 해와 너무나 달라진 참가자들의 구성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한 현상은 중학생 이상 참가자에게서 주로 나타났습니다. 참가한 아이들이 선생님이나 다른 아이들을 그저 TV 프로그램을 감상하듯 건조하게 바라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채널을 바꾸듯 아무런 부담이나 거리낌없이 그 장소를 벗어나거나, 몸은 그곳에 있어도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나간 캠프에서도 그런 학생들이 간간이 있긴 했습니다. 그런 경우에 캠프 진행자는 그 학생들이 ‘무기력하기’라는 특별한 방법으로 나름대로 인간관계를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그 학생을 건강한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경험하는 친구들 안으로 끌어들이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시도를 조심스럽게 시행하여 성공의 즐거움을 맛보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 참가 학생 거의 모두가 ‘무기력하기’ 증상(?)을 보이고 있어 캠프를 실시해 온 이래 우리를 가장 난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번에 참가한 학생들은 어떠한 인간관계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무기력하기’ 증상은 초등학생들에게서는 아직 미미하게 밖에 감지되지 않았지만 중학생부터는 캠프에 참가한 모든 학생들에게 만연된 전염병 같았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아웃사이더가 되어갔습니다. 예외가 있었다면 ‘범생이’와 ‘빨간머리’ 정도였습니다. ‘범생이’는 학교에서는 그런대로 자신의 자리가 있었지만 이곳에서마저 ‘범생이’라는 낙인이 찍혀 왕따를 당할까봐 프로그램에서 원하는 과정을 따라하지도 못하고 선생님의 눈치가 보여 아주 안 하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상태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한편 학교에서 자퇴를 권고 받고 있는 ‘빨간머리’는 학교에서는 일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했던 교류가 공식적으로 용인되는 이번 캠프에서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기세등등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친구들이 그 ‘빨간머리’와 진정으로 교류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지요. 가수가 꿈이라는 ‘빨간머리’는 방청객을 앞에 두고 텔레비전 프로를 방영하듯 자신의 재주를 다해 그들에게 볼거리, 들을거리를 제공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며 자신을 주목해주는 시청자(?)들 사이에서 유명스타가 된 것 같은 착각을 즐기며 나름대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왜 대다수의 아이들이 시청자로 머물러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우선 컴퓨터에서 찾았습니다. 컴퓨터 통신을 통한 채팅이나 정보교환은 요즘 아이들의 대표적인 인간관계, 혹은 교류 방법입니다. 컴퓨터가 아이들에게 해방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우려한 것은 그것이 일방적인 관계라는 점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사람에게, 보이고 싶은 만큼만, 때로는 진짜의 자기가 아닌 가상의 자신을 만들어 보여줄 수 있고, 또 싫증이 나면 언제나 상대방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 관계를 끝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보여주는 입장은 물론이고 보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해도 상당 부분은 거짓일 거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합니다. 혹시 마음이 통해 ‘번개’로 만나 서로를 확인해보는 경우가 가끔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혹시나’가 ‘역시나’로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통신상으로의 만남은 항상 일시적이고 단편적입니다.
또 모두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관계를 지속적으로 계속하고 있는 것은 그렇지 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그런 일방적 관계마저 없다면 자신의 삶이 너무도 삭막하기 때문에 그런 일시적인 관계라도 가지면서 자신이 위로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수의 우리 청소년들이 이런 관계에 너무 익숙해져서 다른 인간관계, 즉 살아있는 인간이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상대방을 온전히 바라보며 느끼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어색하고 힘들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관계의 욕구’를 인간의 기본욕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욕구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충족되어본 경험이 없을 경우에는 나름대로 왜곡되어 발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서로 눈을 마주치고 언행을 통해 형성된 인간관계에서 항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자신이 상처를 덜 입는 방향을 찾아 관계의 욕구를 충족시키게 마련인 것입니다.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전에는 다른 방법으로 변형되더라도 결국은 인간끼리의 교류를 통해 서로 마주하는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고, 그 범주 안에서 일탈행동을 발전시켰습니다. 일탈행동, 즉 학창 시절에 저지를 수 있는 소위 ‘비행’이라는 행동들도 궁극적으로는 인간들끼리 부딪치며 일어난다는 점에서 직접적이고 쌍방향의 ‘인간관계’ 범주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요즘 청소년들 대부분은 컴퓨터를 통해 변형된 인간관계를 경험하기 때문에 굳이 눈에 띄는 비행에까지 이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나 선생님들이 볼 때는 별일 없이 잘 크고 있는 내 자녀, 내 제자라고 여기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직접 만나 온전한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가 아닌 단편적이고 일방적인 관계만이 익숙하여 직접적이고 책임감이 따르는 쌍방향의 인간관계가 점점 더 불편하고 힘이 들게 될 때, 성장하여 겪게 될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 등을 상상해 보십시오.
타인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교류하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경험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거나, 경험하는 것이 두려워 항상 회피하거나, 어느쪽이 되었든 간에 변화될 것이 분명한 미래사회에서는 힘들지 않게 적응하며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의 미래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외로움과 부족함이 평생 따라다니고 그것은 앞으로의 사회를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별로 기분 좋은 상상은 아닙니다. 어쨌든 이번 캠프에서는 아이들보다 선생님들이 느낀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의 기본 틀은 양육자, 즉 부모와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자연의 일부로 진화되어 왔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항상 양면성을 갖습니다. 즉 어떤 면이든 때에 따라서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은 발표력이나 사교성이 적은 반면 한 가지 문제를 깊이 탐구할 수 있고, 적은 수의 사람들과 깊고 긴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장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면이든지 어떤 곳에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유용함이 결정되는 것이지 그것 자체로 나쁘다, 좋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산업 자본주의는 매스컴을 통해 유용한 것이나 좋은 것이 따로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호도하고 있으며 자신의 주관을 갖지 못한 대다수의 부모님들은 자식을 잘 키우겠다는 욕심으로 소위 ‘좋다’고 하는 것들만을 좇아서 자식들에게 그런 모습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쁜 면은 없이 좋은 면만을 나타내라고 요구하며 그런 사람으로 키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자신의 나쁜 면은 숨기거나 부정하게 됩니다(자녀들에게 있어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켜서라도 부모와의 관계는 유지시키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공부를 잘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부모님들은 어려서부터 자녀가 책을 가까이하고 발표력이 좋고 예능 방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를 바랍니다. 그런 것들만을 부모에게 보여야 하는 자녀는 자신의 그렇지 못한 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함을 느낍니다. 사실은 만화책도 보고 싶고, 여럿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 겁이 나도 부모 앞에서 못 한다고 말했다간 ‘자신감이 없다’거나 ‘의욕 없는 놈’이라는 야단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없는 마음을 숨기고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하는 척하면서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 관계를 지속하다 보면 부모님을 만나는 일이 점차 부담스러워지게 됩니다.
옛날에는 이러다가 소위 ‘문제아’로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부모들이 자녀를 통제하는 수준이 더 높아져서 친구를 사귀는 문제까지 꿰뚫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도 부모님이 원치 않는 것을 할 용기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인간관계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과의 관계는 죄스럽고(부모님들의 기대만큼 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나고(구체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되라는 부모에게 자녀는 분노를 갖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랑받고 싶기 때문에 부모에게 매달리게 되어 다른 인간관계를 못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주변에서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컴퓨터통신을 접하게 되고 그곳에서 한가닥 안도의 숨을 쉬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할 때 들어가 아무 때나 기분 내키는 대로 나오면 됩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대로 마음대로 꾸며서 나를 표현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런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괴로운 부모님과의 관계를 보충하기 위해,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는 ‘나도 괜찮은 면이 있는 사람이야’라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컴퓨터로 도망을 가고, 급기야는 중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중독이라는 것은 그곳에 가면 기존의 모든 갈등과 불안이 가라앉아 위로를 느끼고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달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편안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찾게 되는 힘과 방향성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기본이 되는 불안감이 없다면 중독을 일으키고 말 것도 없습니다. 건강하게 공부 잘하고 인간관계가 좋은 청소년들이 이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중독이 된 아이들은 다른 종류의 인간관계를 경험하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원리를 이용하면 됩니다. 즉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온전함을 느끼도록 해주시면 됩니다. 부모님들이 그럴 기술과 방법을 몰라서 걱정이라면 가까운 상담기관의 부모교육에 등록을 하셔서 2년 간만 꾸준히 공부를 하십시오. 분명 자녀들과의 관계가 나아져 올바른 인간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자녀의 증상이 심해서 하루가 급한 분들은 자녀와 함께 상담을 받으십시오. 많은 부모님들이 당장의 학교 공부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우선은 성적부터 올려놓고 나서 다른 일을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청소년들의 마음은 너무도 황폐해져서 ‘죽을 생각’만 하거나 ‘그저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린다’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은 ‘아무 생각이 없어요’, ‘몰라요’만을 되뇌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2박 3일 간의 캠프에서 청소년들과의 씨름을 통해 엿본 그들의 진짜 마음의 일부입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관계를 알게 하고 그들이 가진 힘을 알게 하고 나면 공부든 운동이든 예능이든 무엇이든지 스스로 죽을 힘을 통해 성취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녀가 눈에 띄는 비행을 보이지 않고 학교에서도 별 문제가 없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런 부모님들의 기대 때문에 아이들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스스로 부모의 기대에 못 미쳐 자신은 아무 쓸 데가 없으며 따라서 주위의 어떤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게임으로 통신으로 피난을 가서 자신을 잊고 지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전적인 책임은 바로 부모님들에게 있고 우리 사회에 있습니다.
우리 연구소의 팀들은 당분간 이런 청소년들을 어떻게 다시 인간들이 숨쉬는 공간으로 끌어내어 그들에게 한번 참가해 볼 만한 장으로 만들어 볼까를 연구하기 위해 당분간 청소년 캠프를 쉬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부모님, 특히 양육자로서의 어머니가 가진 힘에 두려움을 갖습니다. 어머니, 즉 양육자는 자녀들의 성격을 결정하고 그들 인생의 방향키를 가지고 있는 무서운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가진 그 힘을 깨닫지 못해서 엉뚱한 결과를 맞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를 두신 어머님들! 자녀들의 운명은 당신들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 힘을 원하는 방향으로 잘 쓸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좋은 부모님이 되시는 교육에 참여하시기를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