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런 저런 여행준비에 저녁 늦게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음에도, 새벽 5시가 되자 눈이 번쩍 떠졌다. 드디어 머나먼 프랑스 땅에서 가장 은총 받은 곳, 떼제(taize)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방금 비가 개여서인지 드물게 시원하고 맑은 날이었다. 날씨만큼이나 상쾌한 마음으로 약속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날아갈 듯했다.
그날 처음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첫 만남의 어색함도 잠시, 일주일 간 같은 배를 탈 우리 28명은 금방 친해졌다. 아침 7시, 대구를 출발해서 인천공항까지 5시간, 거기서 파리행 비행기를 타고 12시간, 다시 버스로 6시간 남짓…. 하루를 꼬박 이동하고서야 드디어 떼제에 발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떼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중이었다. 떼제에서 우리를 제일 먼저 반겨준 것은 빨간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레몬티와 한국인 수사님이셨다. 레몬티의 향긋함과 우리를 맞아주시는 수사님의 환한 미소는 지친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신뢰와 나눔, 화해
떼제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남쪽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의 이름으로,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로제 수사님께서 처음 만드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뢰와 나눔, 화해라는 소명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은 수사님은 이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여행을 하던 중 하느님께서 그를 인도하시어 여기에 그리스도에 의한 공동체를 만든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 떼제는 매주 100여 개 국으로부터 3~6천 명의 젊은이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그분이 자신들에게 주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모여드는 기도와 만남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떼제는 갈라진 교회들의 화해와 그리스도를 통한 공동체 안에서의 일치를 도모한다. 이 때문에 떼제를 찾는 사람은 종교나 인종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잠시 생활을 멈추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싶은 사람, 정신적 양식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올 수 있는 곳이 바로 떼제이다.
떼제에서의 아침은 무척이나 새로운 것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부시시한 눈을 비비며 사람들은 하나둘씩 교회로 모인다. 그리고는 아침기도를 시작한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 얼마나 행복한 체험이었던가. 매일 3번씩 기도를 드리는 떼제의 기도 방식은 독특했다. 어느 특정 종파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 기도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수없이 많은 다른 민족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기도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은 떼제 노래가 아닌가 생각된다. 떼제 노래의 특징은 짧은 구절로 이루어진 노랫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른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낯선 언어로 된 노래가 생소하게 느껴졌지만 아무 생각 없이 노래를 계속 따라 부르는 사이에 의미가 말로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전해졌다.
같은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도 그 느낌이 같은 적은 한 번도 없었을 뿐 아니라 점점 그 말씀이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듯한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께 다가가는 사람들이지만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으니 어느새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떼제 노래의 감동은 침묵기도로 이어진다. 첫날에는 이 시간이 지루하고 자꾸 잡념이 생겨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침묵시간은 소중한 시간이 되어갔다. 하느님이 내 곁에 오셔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편안하게 하느님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느님과 대화를 할 수 있다니…. 그때만큼 하느님 ‘아버지’란 말이 가슴에 와닿은 적은 없었다.
영혼의 오아시스
기도 외에도 모임시간이 있었는데 이때는 비슷한 연령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의견을 교환한다. 이 시간은 다른 나라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서로의 생각을 교환함으로써 나를 돌아보고 서로 배울 수 있는 시간이다.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모순된 생각을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토요일 저녁 미사는 한 주일 중에서 최고의 미사이다. 떼제를 찾아온 모든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초에 불을 밝히며 기도드린다. 밝고 영롱한 빛을 내며 타들어가는 초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자신은 불타 사그라지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밝은 꿈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또 이날은 특별히 로제 수사님께서 직접 강론을 해주신다. 항상 순수한 어린아이들에 둘러싸여 미사를 보시는 로제 수사님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한국인 수사님께서 특별히 배려해주셔서 우리 28명은 모두 로제 수사님께 안수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으로 덮은 로제 수사님의 따뜻한 손이 내 머리에 닿는 순간 너무나도 황홀하고 행복해, 깨기 싫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사님의 맑은 향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느낌….‘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떼제에서의 한 주가 지나갔다. 떼제에서의 생활은 바쁜듯 하면서도 여유로웠다. 이 여유는 마음의 평화가 가져다준 행복 때문이 아닐까.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포근해지고 평온해지는 내 모습이 놀랍기만 하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떼제를 방문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떼제를 지나가는 것은 샘터를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나그네는 잠시 쉬면서 갈증을 풀고 길을 계속 갑니다. 수사님들은 여러분이 기도와 침묵 가운데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된 생명수를 마시고 주님의 기쁨을 맛보며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기를, 그리하여 이곳을 다시 떠나 여러분들의 본당과 학교,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의 일터에서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여러분의 형제 자매들을 섬기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정말 그랬다. 떼제는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오아시스와도 같은 곳이었다. 나는 떼제에서의 경험을 통해 하느님의 크나큰 은총을 새삼 깨달았고 하느님이 나의 생활 깊은 곳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떼제에서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뒤로한 채 떼제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