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부산 남구 대연4동 산동네에 있다. 멀리 광안리해수욕장이 보이는 곳이다. 우리 집 골목에는 개를 키우는 집이 많다. 우선 우리 집 셋방에 한 마리, 옆집에 한 마리, 옆집 건너서 한 마리, 뒷집에 두 마리 등 손에 꼽을 수 있는 강아지 수만 해도 대여섯 마리는 된다. 문제는 이놈의 강아지들이 동네 골목에 똥을 자주 싸는 것이다.
이 개똥을 치우는 일은 우리 집 어머니 차지다. 올세 예순셋이신 어머니는 동네에 개를 함부로 풀어놓는 것도 문제지만 골목 한번 제대로 쓰는 사람이 없다는 게 몹시 못마땅하신 모양이다. “아랫방 젊은 사람들은 셋집 산다고 그런지 개를 키우면서도 골목 한번 쓰는 법이 없어” 하시며 역정을 보이신다. 그래서 쉬는 날 나도 방에 있기가 뭣해 아이들에게 제안을 한다. “애들아, 우리 나가서 골목 청소하자.” “아빠 왜 우리만 맨날 치워야 해요? 다른 사람들은 버리고도 안 줍는데….”
아이들과 함께 가끔 골목 청소를 하다 보면 옛날 생각이 절로 난다. 시골 초·중학교 시절에는 매월 한두 차례는 아침 일찍 동네청소를 한 것 같다. 동네마다 애향단이란 것이 결성돼 아침청소에 동원이 된 것이다. 아마 새마을운동의 일환이었던 같다. 그때는 청소를 하면서 개똥도 밟고 소똥에 미끄러지기도 했다. 어쩌다 10원짜리 동전이라도 한 푼 주운 날이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아무튼 요즘 우리 동네 개똥은 우리 어머니 손으로 거의 치워진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우리 집 옥상의 예닐곱 개 되는 텃밭상자에 거름으로 들어간다. 우리 집 옥상은 그런대로 재미있다. 가지, 고추, 부추, 방아, 시금치 등 다양한 채소가 있고 봉숭아도 피어 있다. 이층 슬래브집 17평 공간은 우리 집 ‘옥상농장’이다. 물론 부모님들은 이밖에 인근 빌라 뒷산에 있는 10평 남짓한 텃밭을 빌려 무, 배추, 시금치를 본격적(?)으로 기르고 계신다. 초등학교 6학년, 4학년 두 아이는 아침마다 옥상농장에 물 주는 게 일이다.
외동인 나는 교사인 아내와 결혼해 아이 둘 해서 모두 여섯 식구가 됐다. 예전 아버지, 어머니, 나 셋이던 식구가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결혼한 뒤 우리 집은 부모님과 아래 위층에 함께 살고 있다. 휴일 아침식사를 하다 옛날 어릴 적 고향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통영시 봉평동으로, 속칭 해평(海坪)이라는 곳이다. 내 이름도 이곳 해평의‘해’자와 어머니의 고향인 인근 광도면 창포(蒼浦)의‘창’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이야기는 이 해평이란 마을의 ‘똥이야기’로 이어졌다. 올해 예순일곱으로 오피스텔 관리소장 일을 하고 계시는 아버지 말씀은 이랬다. 해평이란 곳은 지금은 주택단지로 바뀌었지만 예전엔 바다 근처에 채소밭이 많았던 곳이다. 해평을 남들은 ‘똥골동네’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이유는 비료가 귀하던 시절, 주로 인분으로 농사를 지었기에 이곳을 지나면 ‘특유의 향기’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당시 이곳엔 스무 가구 이상의 채소농가가 있었다. 충무대교가 있는 통영 앞 바다를 두고 건너편 서호동 시장엔 공동변소가 두 개 있었다. 0.5t 정도 되는 나뭇배를 타고 채소농가 7~8 가구가 책임을 지고 돌아가며 공동변소의 인분을 배에 싣고 왔다. 저자거리에 채소를 싣고 가서 팔고 돌아오는 길에 퍼담아 오는 경우도 있었다. 한 배엔 보통 20~25장군(1장군은 30ℓ정도)의 인분을 실었다. 배를 육지에 대놓고 사람들은 긴 나무 양쪽에 나무통 하나씩 달린 목두채를 해서 날랐다. 가져온 인분은 4~8배 정도 물을 타서 100~200장군이 되도록 희석을 시켜 밭에 뿌렸다. 당시 한 달에 한 번 공동 구입할 정도로 비료가 귀하던 시절 인분은 질소 인산 가리 등 모든 요소를 갖춘 종합비료였던 셈이다. 그래서 키운 것이 양파, 배추, 대파, 오이, 토마토 등의 채소였다.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 다닐 때까지 틈틈이 ‘종합비료’ 주는 일을 도우셨다고 한다.
그런데 사정이 변했다. 60년대 후반 들어 똥배도 똥장군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비료가 대량 보급됐고, 고단하고 지저분한 일을 할 머슴일꾼 구하기도 점점 어려워졌다. 당시 농가에는 먹고 자고 하면서 한 해에 쌀 두 가마니 정도 받고 일하는 젊은 머슴일꾼들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농가에서 자고 먹고 하는 젊은 아이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농약도 귀할 때라 멸구 박멸을 위해 바다기름 등을 논밭에 퍼붓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는 똥이 아니면 채소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농사를 짓다보면 일종의 피부염인‘똥독’이 올라 온몸이 간지럽고 부풀어올라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들이 “할아버지, 똥으로 키운 채소, 냄새가 나서 어떻게 먹었어요?” 해서 온 식구가 한바탕 웃었다. 아버지는 요즘 사람들 먹는 걸 봐선 유해물질이 너무 많아 거름으로 쓸 수도 없을 것 같다고 덧붙이신다.
이러다 보니 그저 편리하게만 보이는 도시의 수세식 화장실은 오히려 ‘반문명적’인 것 같다. 채소를 기르던 거름이 처치 곤란한 쓰레기로 바뀌고, 이 쓰레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우리 사회.
비단 똥 문제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는 쓰고 버릴 줄을 알아도 주울 줄은 모르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출퇴근을 하다보면 버스 정류장에 버려진 엄청난 꽁초들. 그것도 버스정류장 주변 하수도 구멍을 쓰레기통 삼아 집어던지는 사람들. 지하철 계단마다 어지러운 광고 전단 쓰레기들. 어쩌다 떨어진 꽁초를 주워 쓰레기통에라도 버린 날이면 회사에 가서 손을 씻을 때까지 손가락 끝에 그놈의 꽁초 냄새가 달아나지 않는다.
버리는 것이 다시 입으로 돌아온다는 평범한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실의 계절 가을, 우리 집 앞 골목의 개똥을 치우면서 잠시 ‘개똥철학’에 젖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