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주일 교중미사 후에 성체강복을 연이어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는데 성체강복 때는 미사를 라틴어로 드렸듯이 반드시 성가도 성체노래, 성모노래 그리고 딴뚬에르고를 라틴어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수녀님이 계시지 않은 성당에서는 성체강복 때에 신부님 혼자 성가를 부르고 하든지 아예 하지 않든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녀님들이 계신다 하더라도 다 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라틴어로 노래할 수 있는 성가대가 있는 성당도 몇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구의 원로 사제이신 이기수 몬시뇰께서 비산동성당 신부님으로 계실 때 성체강복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마침 본당 수녀님들이 몇몇 신자들과 같이 라틴어 성가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음정도 곡도 맞지 않게 부르자 감실 문을 여시다가 뒤를 돌아보며 “치워라 ! 치워 ! 예수님 내다보고 웃으시겠다”며 야단을 치고는 성가를 중단시키셨습니다. 교우들은 당황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그날의 성체강복이 분심으로 끝난 일까지 있었습니다.
성당 안에 있는 것은 성화이든 성상이든 혹은 오르간이든, 요즘 같으면 에어컨, 난방기구 등 교우들이 기도하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아주 간단하고 명확한 원칙에 따라야 합니다.
언젠가 새로 지은 성당의 첫 미사에 간 적이 있었는데, 참 아름답게 꾸며진 성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대 양 옆에 대형 에어컨을 설치하여 그 소리가 제대 쪽에 있는 여러 개의 성능좋은 마이크를 통하여 증폭되어 울리는 바람에 마치 큰 군함 엔진칸 속에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강론 말씀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서 기도를 하고 정성을 바친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말이 난 김에 풍금(오르간)과 성가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음악에 관하여 문외한이지만 기도하는 측면에서 말씀드립니다. 성가는 분명 가장 열정적인 기도이기 때문에 회중이 모인 곳에서 성가를 같이 한다는 것은 한마음 한뜻으로 정성을 바치는 가장 좋은 기도 방법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은 일을 하면서도 기도를 바치곤 하셨는데, 자연스럽게 그 기도에 곡이 부쳐져서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흥얼거리는 것을 자주 듣고 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성가의 기본 자세라고 봅니다. 기도의 내용(낱말)을 가장 깊고 아름답게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이고, 그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곡(멜로디)인데, 우리는 그동안 성가를 개혁한다면서 곡은 그냥 두고 가사(내용)를 변경시키는 무식한 짓을 행한 예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말마디와 문장이 가지고 있는 표현력과 힘을 빼는 곡(멜로디)은 있을 수가 없는데 성당에서는 늘 그렇게 해 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가가 기도는 될 수 없습니다. 다만 멜로디에 따라 지르는 소리이지요. 그렇게 해서 뜻을 죽인다면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주는 격이 될 것입니다.
성당에서 사용하는 악기도 같은 맥락에서 알아듣고 사용해야 옳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많은 다양한 악기들 중에 지금까지는 몇 가지만 사용하는 것을 전통으로 여겨왔습니다. 구약성서에도 나오는 현악기, 관악기 그리고 얼마 전에 계산동 주교좌성당에서 장만한 파이프 오르간 등은 그 악기의 도움으로 더 좋은 노래, 즉 더욱 정성된 기도를 바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교회의 전례 악기가 되었습니다. 오르간이 성당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이유는 그 기계 하나로 모든 순한 악기를 다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젊은 사람들을 위한 미사에 타악기를 사용하여 생동감 있는 젊음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많은 성당에서 일고 있는데 그런 미사를 지내면서도 가끔씩 내가 젊은 사람들을 따라 기도를 바칠 수 있는지 의심을 하곤 합니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인상깊은 영가를 부르면서 바치는 미사와 비교할 때 껍데기(리듬)만 따라하고 내용은 마음속 깊이 와닿는 것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악기로 성가 반주를 할 때에도 기도를 잘 바치기 위한 보조 역할을 한다는 원칙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층계송을 할 때 계송은 보통 성서 시편의 구절을 인용하여 고운 목소리로 불러 교우들이 조용히 듣고 모두가 호응하여 응송을 큰소리로 부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악기의 강약을 조절하지 못하여 풍금소리 때문에 계송을 전혀 듣지 못하게 될 때는 “저 놈의 악기가 마귀노릇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예는 미사의 모든 부분에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장례미사에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 노래하는 경우, 비록 강론이라도 그렇게 하면 무엇인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 것입니다. 기도에는 목소리뿐 아니고 분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림절이 다르고 사순절이 다르고 부활절이나 성령강림절이 달라야 합니다. 그리고 축일의 성격도 뚜렷이 구별되어야 참뜻이 살아있고 기도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수녀원에 가서 공동 기도나 미사에 참여하면 그 분위기가 신비한 느낌으로 와닿지만, 한 번 가고 두 번 가면 다 죽어 가는 목소리에 … 쥐어짜는 듯한 한결같은 가성의 목소리에 곧 싫증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내용의 말을 살리지 못하고 천편일률적인 곡조에만 중심을 두고 바치기 때문입니다. 독일에는 유명한 시인들과 음악인들이 많았습니다. 괴테 같은 시인들의 작사들을 가장 잘 표현되도록 작곡가가 곡을 붙여놓은 것이 유명한 독일 가곡입니다. 똑같은 모양으로 성경말씀이나 성인들의 작사 기도를 작곡한 성가와 반주가 오늘날의 교회음악을 일궜습니다. 이 모든 것의 목적은 기도였습니다. 우리도 하루 빨리 우리의 기도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교회음악 작곡가가 많이 배출되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성상이나 성화(색유리)까지도 그 자체를 예술품으로만이 아니고 기도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그 목적이 뚜렷해질 것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얼굴이 찡그려지고 어떤 때는 섬뜩하리만큼 우리 생각과 느낌이 다르다면 아무리 독창적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지에 가서 오래된 성벽에 기대어 열성적인 기도를 바치는 유대인들을 보면, 겨우 몇 개 남은 옛날 성벽 돌이 말없이 기도하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실감나게 합니다. 성당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색유리, 성상, 성화, 풍금, 장궤틀 등이 우리 모두가 원하고 갈망하는 주님과의 내적인 상봉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고 기도를 바치는 데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귀한 것입니다.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잘 가꾸어 나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