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가 문제행동을 보일 경우에는 우선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행동을 해결하는데 급급하여 원인을 살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특히 자녀의 문제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일 경우에는 그 행동에 대한 적절한 배상과 해결과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동은 자신의 문제행동이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자녀의 문제 행동에 대한 적절한 해결과정을 거친 다음에는 반드시 차분하게 그 근본 원인이나 심리상태를 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자주 겪게 되는 자녀의 문제행동 중의 하나는 도벽입니다. 일반적 의미의 도벽은 ‘훔치는 행동’으로써 남의 물건을 훔치는 습관화된 버릇, 주인의 눈을 피해 남의 것을 가지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보통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과 병적 도벽이 혼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의 5%만이 병적 도벽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자녀가 남의 물건을 훔쳤다고 해서 무조건 병적인 도벽으로 간주하고 과도하게 당황하여 반응하기보다는 전문가와의 상담 등을 통하여 자녀의 심리상태를 세심하게 살피고 그 원인을 찾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병적인 도벽의 상태까지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도벽을 갖게 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라면 도덕개념이 불완전해서 빌리는 것과 훔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아이의 삶에서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경우에 부모의 사랑, 관심, 염려 등을 상징적으로 대신하는 행위로 물건을 훔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부모가 무의식적으로 훔치는 행동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그릇된 모방심리라든지, 과시욕, 경제적 어려움,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 우울증, 정신과적 질환 등이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지능이 낮은 경우, 학습장애, 뇌 손상이 있는 경우에도 많이 나타납니다.
자녀가 도벽 증상을 보일 때 가정에서 부모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원인에 따라 각기 다르겠지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즉각적인 대응입니다. 이런 행동을 무시하거나 사소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닥치는 대로 요란하게 대응하라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행동하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감정을 잘 살펴야 합니다. 처음에 그 사실을 알면 누구나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지겠지만 일단 침착성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이의 문제 행동을 부모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자제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나름대로 아이의 행동의 원인을 먼저 공감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아이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화를 내고 비난을 먼저 하는 것은 거짓말과 변명만을 키우는 일이므로 너에게로 열려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만일 도덕성 결핍에서 생긴 문제라면 남의 것을 들고 오는 것은 나쁘다는 명백한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아이의 존엄성을 존중해주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부모로서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 그러나 물건을 훔치는 행동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친구 집에서 그 물건을 들고 왔다면 아이와 같이 가서 돌려주고 가게에서 물건을 들고 왔다면 같이 가서 값을 치르십시오. 이 경우에 사과를 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잘못을 고백했거나 물건을 돌려주고 난 후에는 부끄럽고 힘든 일을 마친 자녀의 노력을 칭찬해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번 일은 잊혀질 수 있다말해주어 안심시키십시오. 절대로 아이에게 “도둑”·“도둑놈”이라는 꼬리표를 붙이지 마십시오. 한두 차례의 잘못으로 아이의 자아상이 완전히 부정적인 모습으로 고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련의 해결과정을 거친 후에도 반드시 자녀의 행동에 대한 심리 상태는 물론이고, 부모 자신의 문제까지 세심하게 살펴 그 근본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일시적인 도벽을 습관적이고 병적인 도벽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할 수 있고 가족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불화를 막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K부인은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도벽이 있다며 상담실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직장에서 항상 훌륭한 교사로서 행동하려고 노력했고, 집에서도 늘 모범적인 역할을 하고자 노력해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슈퍼마켓 주인이 전화를 해서 아들이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K부인의 충격은 말로 하기 힘들 정도로 컸습니다. K부인은 보통의 부모들이 그렇게 하듯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상담소를 찾은 것은 그 시도 중의 하나로 결과적으로는 아들의 도벽 뿐 아니라 속으로 곪아있던 가족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주 훌륭한 기여를 한 선택이었습니다.
K부인에게는 아들만 둘이 있습니다. 문제행동을 보이는 4학년 짜리가 큰아이인데, 엄마와 함께 한 상담에서 큰아들 한솔이는 동생 두솔이에 비해 집안 식구들의 관심과 애정을 못 받는다고 느낄 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자신을 미워한다며 울먹였습니다. K부인은 처음에 아들의 말을 듣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상담 횟수를 더해가면서 자신이 남편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과 한솔이가 외모에서부터 성격까지 남편을 빼닮았기 때문에 함께 미워했고 그런 자신이 더 미웠다며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았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K부인과 남편, 그리고 두 아들이 참가한 가족상담에서 K부인은 아들문제는 잊어버리고 남편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이혼을 하자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13년 간 무능한 남편을 대신하여 시부모를 모시고 자식을 길러주었는데 결국 남편이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 아들의 도벽이 생겼으니 더 이상 자신을 희생하며 가족을 지켜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들 문제가 거론될 때에도 소극적으로 듣고만 있던 남편이 부인의 흥분을 진정시키다가 드디어는 이혼을 제기해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라며 폭탄선언을 하였습니다. 자신도 13년 동안 부인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사사건건 간섭을 받고 사는 것에 지쳤다고 하였습니다. 하다못해 텔레비전도 자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못 보게 하기 때문에 부인 눈치를 보아가며 시청해야 하고, 조금 늦는 날에는 부인이 얼마나 화를 낼까 겁을 내며 문 앞에서 망설이는 자신의 처지가 가련하고 한심하던 차에 잘됐다며 맞섰습니다.
부부가 격렬히 싸우는 곁에서 두 아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한솔이는 자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이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자신은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정말 구제불능의 나쁜 놈’이라며 자책하고 있었고, 두솔이는 형에 대한 원망과 함께 형 몫까지 공부 잘하고 착한 어린이가 되겠으니 제발 부모님이 헤어지지만 않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든지 부부가 싸움을 하면 자녀들은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능한 몸부림을 하게 됩니다. 한솔이의 도벽은 부모님의 관심이 서로 간의 갈등상황에서 한솔이에게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부부 싸움을 하던 부부도 우선은 자식의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하게되므로, 당장은 부부문제가 희석된 듯한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한솔이는 부정적 행동을 극대화시켜 부모님의 화합을 도모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한솔이는 일시적이고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부모님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꿀 수 있었고, 한솔이가 훔치는 것은 현상적으로는 물질이나 돈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어머니에게 받아야 할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부모를 자신의 부정적 행동을 통해 만 천하에 알리는 고발의 기쁨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한솔이가 자신의 훔치는 행동으로 이렇듯 일석 삼조의 효과가 있을 것을 계산하거나 인식하고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당장은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위험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형 때문에 착한 아이로 낙인찍힌 둘째 두솔이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착한 아이가 되는 것으로 부부갈등을 줄여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 상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한솔이는 무조건 나쁜 아이, 두솔이는 무조건 착한 아이가 되고 형제 사이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커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K부인이 한솔이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K부부가 갈등상황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문제의 원인을 남편의 잘못된 행동에서 찾으려 하지만 상담에서는 우선 근본적인 인간관계와 감정의 패턴을 찾아내고 그 매듭을 풀어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K부인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자라면서는 실제적인 가장의 역할을 했으나 친정어머니는 아들(K부인의 오빠)에 대한 기대와 애정으로 가득차 딸에게는 심리적인 지지를 전혀 해주지 않았습니다. 결혼으로 친정의 불행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친정에서의 인간관계와 그에 따르는 감정을 똑같이 새로운 가족관계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불행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 상담 끝에 K부인은 엄마와 살며 아웅다웅 다투고 있는 오빠를 찾아가 따뜻한 시선과 말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오빠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나니까 남편이 별로 밉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오빠에 비해 기본적인 경제적 책임을 지고 있었고 유능하지는 않지만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도 잘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부모님이나 가족에게 언어적 신체적 폭행을 행하지 않는 것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에게서 오빠의 그림자를 지우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자연히 한솔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그 동안 주지 못했던 관심과 애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한솔이의 도벽은 없어졌고 학교에서의 적응력도 눈에 띄게 향상되어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된 K부인은 상담을 중단했다가 2년 정도 지난 얼마 전 다시 상담실을 찾았습니다.
상담자는 K부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인간관계와 감정의 패턴을 아직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고 그 매듭을 풀지 못한 시점인데 표면적으로 나타났던 한솔이의 도벽문제가 해결되어 상담을 중단했으므로 또 다른 방향에서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상담실을 찾은 K부인을 보며 상담자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렇게 상담실을 찾아오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K부인은 상담실에서 실시하는 집단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의 근원적 출발점을 찾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가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잘나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사랑하게 되기까지의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마치면 본질적으로 자신과 같은 모습인 타인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그렇게 인간 이해를 확장해 갈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걸고 행하는 잘못된 지배와 기대, 간섭과 희생은 자녀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경우보다 험하고 오염된 길로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과 다르지 않고, 자녀를 올바로 지켜주는 일은 나를 올바로 지키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