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알고 또 하느님께서 저를 불러 주신 것은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 유교와 미신을 많이 믿었습니다. 우리 할머니께서는 기회가 되면 점쟁이를 데려다가 굿을 하고 산에 가서 촛불을 켜 놓고 절을 하며 백일기도를 하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주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우상숭배였던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한 사람이 밖에 나가서 음식을 먹고 오면 어김없이 탈이 나곤 했는데, 점쟁이를 데려다가 굿을 해야만 낫곤 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 주역 등 한학 공부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 덕에 할아버지께서는 동네 젊은 청년들을 불러놓고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을 가르치셨는데 항상 유교에 관심이 많으셨고 할머니는 미신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린 나이였는데도 그 상황들을 잘 기억합니다. 또 할머니는 신줏당새기를 높은데 모셔 놓고 떡을 해오면 먼저 신줏당새기에 올려놓고 절을 한 뒤 빌고, 부엌에도 신줏단지를 모셔놓고 조상들에게 빌었습니다. 할머니는 걸핏하면 산에 가서 빌고, 할아버지는 정월이면 식구 수대로 토정비결을 봐 주셨습니다. 그리고 식구들 중 누구라도 해로운 달이 있으면 그 달에는 꼼짝도 못하고 집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패막이처럼 외출할 때 발바닥에 십자표를 그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자라 시집을 가서 보니 시어머님께서도 역시나 신줏단지를 신줏당새기에 모셔놓고 절을 한 뒤 빌곤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제 나이 20세 때였습니다. 시어머님이 한번은 음력 12월 30일 섣달 그믐날밤 저를 부르시더니 저를 데리고 개울가로 갔습니다. 물가에 촛불을 켜놓고 저더러 절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없더라도 섣달 그믐날 밤마다 저녁밥 지어 놓은 뒤 꼭 와서 공을 드려라.” 하셨습니다. 저는 꼼짝없이 절하라 하시면 절하고 빌어라 하시면 빌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그런지 무서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제가 몹시 아팠습니다. 각혈을 하고 배가 붓고 몸이 쇠약해지며 숨도 차고 온몸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습니다. 남편이 1년 간 아프다가 겨우 일어나 힘도 못쓰고, 말라서 걸음도 잘 걷지 못했던 그 와중에 저까지 아팠던 것입니다. 아이는 셋인데 기가 막힐 일이지요.
병원을 찾은 저는 주머니에 있는 만 원을 드리며 “몇 달 동안 아파서 힘도 없고 숨도 차고 배는 8개월 된 산모 같은데다 눈에는 자꾸 헛것이 보이고…” 하며 넋두리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하얀 수녀복을 입으신 독일 수녀님이 나오셨는데, 수녀님 덕분에 진찰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아주 나빴는지 독일 수녀님께서는 “빨리 성당에 가세요. 빨리 교리 받고 영세해야 천당에 갈 수 있으니 빨리 성당에 가세요.” 했습니다. 저는 친정, 시집 모두 미신이나 불교를 강하게 믿고 있었으므로, 우리 집은 독실한 불교 신자라 교회나 성당에 못 가게 한다고 수녀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독일 수녀님께서는 “아이고, 무슨 소리고! 당신은 시간이 별로 없는데…” 그러면서 바오로 6세 교황님 사진을 저에게 건네주시며 자주 보고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집에 와서 시어머님한테 성당에 다니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시어머님은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날 또 시어머님을 찾아갔지만 역시 안 된다는 말씀뿐이셨습니다. 저는 말없이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3일째 날에는 마음을 굳게 먹고 시어머님께 갔습니다. 3일째 같은 요구를 하니 어머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어무이요, 제가 이렇게 아픈데 성당에 보내 주시이소.” 그러자 어머님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주는데 마 나가거라.” 하셨습니다.
시어머님은 제가 너무 형편없이 약해진 모습을 보시고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반야월성당 이 이냐시오 신부님께 가서 “신부님, 성당에서 뭐부터 배워야 합니꺼?” 했더니 신부님께서는 “빨리 교리문답 12단문 외워라. 6개월 걸린데이. 안 그래도 파티마 병원에서 전화왔더라. 많이 위험하다고, 만약에 죽을라 카거든 빨리 연락해라. 대세주구로.” 저는 속으로 웃으면서 ‘죽을라카는 사람이 우예 연락하노.’라고 생각하며 성수 한 댓병을 가지고 조금 오다 쉬고 또 오다 쉬며 착찹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 나이 28세. ‘벌써 죽을 것 같으면 말라꼬 세상에 태어났노. 참말로 수녀님 말씀대로 천당이 있으면 빨리 교리 배워 가지고 영세해서 천당에 가 볼란다.’
그때부터 열심히 교리 문답을 읽었습니다. 6개월 배워야 할 교리문답을 저는 20일 만에 다 외우며 묵주기도까지 했습니다. 바빴습니다. 병원약도 타다 먹어야 했고, 죽기 전에 한 가지도 빠짐없이 교리도 배워야 했고… 그야말로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9남매의 맏이였기에 부모 가슴에 못 박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팠고, 세 아이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68년 12월 24일, 모니카라는 본명으로 영세했습니다. 저의 영세를 시작으로 제 동생도 영세를 받아 도나다라는 세례명을 얻었고, 남편은 시메온, 딸은 알비나, 아들은 마티아, 막내딸은 루시아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친정 어머니는 딸자식이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서 영세를 하니 목욕재계하고 시루떡을 한 시루해서 성당엘 갔는데 신부님 말씀이 “너도 마 영세 해라.” 하시니 친정 어머니는 “저는 아무것도 안 배웠는데 어떻게 영세를 합니꺼.” 하니 신부님이 “마 영세 받고 열심히 배우면 안되나 받아라.” 그래서 저의 어머니는 글라라라는 본명으로 우리와 같이 영세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는 12단 문답도 다 외우고 영세도 하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 생각하며 지냈는데 파티마병원 독일 수녀님이 약을 주시면서 많이 좋아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간경화였습니다. 간이 갑자기 돌같이 굳어서 몸에 피라곤 만들어지지 않아 몸이 새카맣게 타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하여 훗날 마리아와 데레사 두 딸까지 낳았습니다. 주님께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저의 삶은 오직 주님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만 온전히 살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주님 자녀로 인도하려고 애를 쓰는데 마음대로 잘 안됩니다. 저의 부족한 전교는 자녀 1남 4녀 중 큰딸 알비나와 사위, 그리고 사돈 내외와 시동생까지 영세, 견진성사를 받게 하고 현재는 지산동성당에 다니고 있습니다. 둘째 며느리도 영세하고, 율리아나와 마티아 부부의 자녀 3남매도 영세하고 저의 셋째 딸 루시아의 남편도 영세하고 두 손자들도 영세를 했습니다. 게다가 시아버님도 대세를 받게 했고, 시어머님도 영세하신 후 지금까지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있습니다. 넷째 딸 마리아의 남편이 영세하고 손자 안셀모도 영세했으며, 다섯째 딸 데레사는 신앙깊은 신자 집안에 시집을 가서 지금 서울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친정에 있던 신줏단지가 궁금하지요? 몇 백년 물려받은 유산이기도 한 신줏단지와 신줏당새기 말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 아버지께서 농삿일을 하러 간 사이, 혼자 집에 있는 동생 도나다가 그 크고 중요한 신줏당새기와 신줏단지를 마당 한가운데 꺼내놓고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요, 예수님요, 성모님요,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머니를 천당에 불러 주이소, 할아버지 할머니 캄캄한 당새기 속에 있지 말고 훨훨 천당 가이소.” 하며 불을 놓았습니다. 그 순간 우리 친정에 수백 년 내려온 신줏단지는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저의 동생 도나다는 20살이었는데, 그 용기와 그 힘은 주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남편과 두 아들을 영세시킨 동생 도나다는 요즘 결식 아동을 위한 도시락을 싸고 있습니다. 저의 동생 도나다 집에는 항상 성당 자매들이 많이들 와서 봉사하고 다같이 모여서 묵주 기도와 9일 기도를 하며 열심히 잘 살고 있습니다.
끝으로 저의 부친도 임종을 앞두고 급히 대세를 받았는데, 뜻밖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부친의 건강이 차츰 회복되었습니다. 좋으신 주님의 성체를 못 영하시는 부친이 늘 제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는 수녀님을 찾아갔습니다. 수녀님께서는 할아버지가 교리반에 오지 못하니 수녀님께서 직접 방문교리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7, 8월이었기에 수녀님은 성당에서 친정집까지 버스로 세 코스쯤 되는 거리를 항상 걸어서 오셨는데 땀에 흠뻑 젖곤 했습니다. 우리 부친은 집에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뒤 1년 간 봉성체를 하고 참으로 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제 남편 시메온과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박강수 로무알도 신부님 그리고 수녀님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