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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니티(Amenity) 세상 만들기
김해창 기자의 푸른통신


김해창 | 기자, 국제신문 생활과학부 차장

새 밀레니엄이라고 하는 21세기에 들어서도 지구촌은 여전히 전쟁과 불신의 20세기적인 삶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9월 11일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 대 참사와 그 후 미국의 대응방식은 평화와 생명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절감케 하고 있다.

  이러한 ‘반생명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21세기의 삶은 아무래도 사랑과 생명의 마음을 키워 나가는 일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나는 사랑과 생명을 바탕으로 한 환경사상인 ‘어메니티’(Amenity)에서 그 가능성을 찾고 싶다.

 

 어메니티를 우리말로 딱 꼬집어 번역하기 힘들다. ‘환경보전, 쾌적성, 청결, 친절, 인격성, 좋은 인간관계, 공생’ 등 번역어가 80여 개나 된다. 요약하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종합적인 쾌적함’을 뜻한다고나 할까. 어메니티는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어메니티는 생명과 사랑이 두 축을 이루고 있다. 19세기, 영국의 대도시에 몰려든 노동자들이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인해 병들어 죽어가자, 이를 보다 못한 크리스천이 중심이 돼 주거개선운동을 벌인 것이 어메니티 운동의 시작이라고 한다. 또 ‘어메니티’의 어원이 라틴어의 ‘아마레’(amare:사랑)에서 ‘아모에니타스’(amoenitas:기쁨)를 거쳐 어메니티(amenity:쾌적함·기쁨)로 변했기에 어메니티는 ‘사랑’을 품고 있다. 이러한 어메니티 사상이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실용주의적 사고에 묻혀 ‘편리성’을 주로 추구하게 됐고, 일본으로 흘러가서는 ‘종합쾌적성’이라는 새로운 환경운동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일본이 어메니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6년 OECD가 발간한 ‘대일 환경정책 보고서’에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금까지 공해방지와의 싸움에서는 이겼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메니티와의 싸움에서는 결코 이기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진정한 불만은 공해라기보다는 삶의 질인 어메니티가 충족되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라는 것이 보고서의 결론이었다. 이에 일본 환경청은 80년대 들어 어메니티타운 계획을 수립했고 90년대 들어서는 지자체별로 건축허가 신청 때 경관을 사전 심의하는 어메니티 형성 조례를 제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난 97년 10월부터 1년 간 일본 도쿄의 환경단체인 AMR(Amenity Meeting Room)에서 연수·취재활동을 한 적이 있다. AMR은 이 ‘OECD 환경보고서’에 충격을 받아 지난 85년에 언론인, 교수, 회사원, 주부 등이 어메니티를 연구·실천하고자 만든 단체이다. 

 

  어메니티의 분야로는 ① 생명·안전  ② 건축·주거  ③ 마을만들기  ④ 지구환경  ⑤ 역사·문화  ⑥ 경관  ⑦ 복지 어메니티 등 다양하다. 어메니티 이론가인 AMR 회장 사카이 겐이치(73) 씨는 “어메니티는 이른바 근대가 내팽개쳐버렸던 진(眞)·선(善)·미(美)·애(愛)를 다시 주워 담는 노력이자, 이를 구체적으로 생활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가치지향의 시민운동”이라고 말한다.

 

  AMR회원이기도 한 동아대 김승환 교수는 지난 94년 부산시 어메니티플랜을 수립했다. 그 뒤 수원, 경기 어메니티플랜 등 지방정부차원의 어메니티플랜이 잇따라 만들어지고 있고 부산시는 ‘어메니티 부산 100경’을 선정해 홍보하고 있다.

 

 이러한 어메니티의 힘이 분출되고 있는 현장으로 부산 동래구 사직동의 한 6층 건물 옥상에 자리잡은 ‘어메니티과학 실험방’(051-504-6052)을 소개해 드리고 싶다. 부산고교의 화학 교사인 김옥자 씨(49)가 연 이 실험방은 10월 말로 두 돌을 맞았다.

 

  김 교사는 “오늘날 자연파괴의 책임은 상당부분 인간중심의 ‘반성 없는’ 과학에 있다”며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알고, 서로 조화를 이뤄 가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어메니티과학”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98년 6월 중등교사 15명으로 어메니티과학교육연구회를 만들었는데 이 연구회의 실험실이 바로 어메니티과학 실험방이다.

 

  이곳 실험방은 자연의 원리를 확인하고 자연에 대한 사랑을 이끌어 내는 ‘호기심 천국’이다. ‘자연 속으로’, ‘이야기 속으로’, ‘실험 속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이곳 실험방엔 공기, 물, 흙, 중력, 전자기력, 소리, 빛, 물, 인간, 숲 등 10가지 주제마당이 있고 이에 따른 실험세트가 갖춰져 있다. 이곳 실험방에 들어가려면 흙 한 줌을 꼭 가지고 가야하는데 이러한 흙이 모인 담장 밑엔 달개비를 비롯해 절로 자란 풀꽃들이 자연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고 있다.

 

  김 교사는 지난 해 99년 여름 싱가포르에서 열린 APEC청소년과학제전에 한국대표로 참가해 ‘어메니티과학’을 국제적으로 알렸다. 편종으로 아리랑을 연주하며 공기의 성질을 설명해 갈채를 받았다. 그의 ‘어메니티 파워’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어메니티 과학실험 연수로 확산되고 있다.

 

  『어메니티 - 환경을 넘어서는 실천사상』(사카이 겐이치, 따님환경신서 19)을 통해 어메니티를 접한 김교사의 실천사례는 저자인 사카이씨를 놀라게 했다. 과학은 ‘반(反)어메니티’인줄 알았던 사카이 회장에게 ‘어메니티과학’이라는 발상은 대단했던 것이다. 지난해 10월 22일 실험방 돌잔치에 초청됐던 사카이 회장은 ‘과학, 사랑, 생명’을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어메니티과학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일본 AMR회원 중에서도 김 교사 같은 분이 있었다. 이자와 마유코라는 30대 초반의 여성으로 메이지 생명보험회사에 다녔는데 대학 때부터 자연식과 일본 다도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그가 첫 아이를 병원이 아닌 집에서 낳았다는 ‘출산이야기’를 2년 전 AMR소식지를 통해 접했다. 제왕절개를 강요하고 모자격리를 당연시 하는 기존의 병원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출산준비를 해 조산원의 도움만으로 집에서 건강한 아이를 낳은 것이다. 이자와 씨는 그 후 모유 수유, 건강한 이유식을 비롯해 1회용 기저귀 안 쓰기, 안전한 유아 장난감 개발 등 육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사카이 회장과 함께 ‘아가 어메니티 학교’를 열어 교감을 맡고 있다.

 

  어메니티는 정의하기보다 느끼기가 더 쉽다고 한다. 사랑이라는 말을 정의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김옥자 교사는 어메니티를 ‘어머니’, ‘티’라고 풀었다. 어머니의 티셔츠처럼 포근한 상태가 어메니티 아니냐는 것이다. 개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전체와 조화를 이뤄나가는 ‘마음씀’이야말로 어메니티 발견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마음씀이 늘어날 때 참된 어메니티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