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이길준(바오로) 신부/1927. 1. 25 출생, 1960. 3. 19 서품, 2003. 8. 9 선종
이 글은 고(故) 이길준(바오로) 신부님께서 울릉도 도동성당의 첫 본당신부(재임기간 : 1960.9-1966.1)로 사목하실 때의 이야기를 적은 일기(日記)입니다. 당시 울릉도의 상황들을 원고지 한 칸 한 칸 만년필로 적어가며 젊은 시절 한 사제로서 느낄 수 있었던 기쁨과 희망, 열정과 사랑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가지 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할 점은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원고지의 첫 장에 해당하는 1쪽의 분실로 부득이하게 2쪽부터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1960년대 울릉도의 풋풋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그 당시 울릉도 신자들을 향한 신부님의 삶을 반추해보면서 그 옛날 울릉도로 떠나보시길 바랍니다. - 편집자 주(註)
울릉도 도동성당 부임
(전략) … 울릉도의 분위기를 탐색하려고 1차 시찰차 섬나라 울릉도에 가서 섬을 일주하고 돌아온 뒤, 1960년 9월 1일부로 울릉도 도동천주교회 본당신부로 정식 부임하였다. 얼마간의 새 살림을 대구에서 꾸려가지고 포항에서 1주일 동안이나 배를 기다렸다가 17시간을 배에 흔들리면서 섬에 도착하였다. 울릉도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신부(神父)가 부임한다고 구경 나온 사람들이 축항(築港, 항구)을 가득 메웠는데, 새 신부라고 하니 섬사람들은 어떤 ‘어여쁜 새 신부(新婦)’가 오는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마중 나온 공소 신자들의 안내로 성당이라고 찾아간 곳이 허물어져 가는 적산가옥이었는데, 그 집마저도 남의 집이었다. 방이래야 부엌방 하나 있고, 1층은 마루, 2층은 다다미방이었는데 모두 헐어서 사용이 불가능했다. 부득이 1층 마루 일부를 철거하고, 온돌방이라도 하나 있어야 하겠기에 작은 사무실 하나와 온돌방 하나를 마련하기로 했다. 2층은 임시로 미사를 지낼 수 있도록 제대를 마련해야 했다.
신자들에게 목수 한 사람을 구하여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그야말로 엉터리 목수였다. 하루 종일 나무 몇 개 톱질하고 대패질 해놓고는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도 식사는 6식(세 끼의 식사와 세 번의 중참)을 요구했다. 그리고 온돌방 하나 놓기 위하여 구들일 하는 사람이라고 왔는데, 작은 온돌방 하나 놓는데 세 명이 와서는 삽질 두세 번 하고는 그들 또한 담배 피고 술 마시며 6식을 요구하니 그야말로 가슴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서 2-3일 일하는 것을 보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다음날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고, 신자 청년 한 사람을 불러서 온돌방 구들일이든 목수일이든 모두 내가 직접 나서서 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일은 어쩌다 신자들이 와도 그 일을 함께 돕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한다는 말이 “무슨 신부가 왔다고 하더니 목수가 온 모양인데.” 하고는 비웃는다. 정말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그 청년과 둘이서 10일이나 걸려서 겨우 잠을 잘 수 있는 방과 제대를 만들어서 마침내 미사를 올리고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 신자들은 주일에 미사참례 해야 한다는 본분(本分)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교리를 가르쳐 주려고 저녁에 성당으로 모이라고 하니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 중 몇몇 부인이 교리에 참석했는데, “아이구, 천주교 믿는 것이 이렇게 어려우면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하더니 며칠 나오다가는 그 사람들마저도 성당에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가정을 찾아다녀 가며 교리를 배워야 한다고 설득을 해보았지만, 도대체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도 구호물자가 왔다고 하면 구호물자의 매력 때문에 몇 주일은 그 작은 집이 꽉 차도록 온다. 물론 배급만 끝나면 또다시 성당은 텅 비어 버리지만…. 그렇다고 성당에 열심히 안 나온다고 해서 구호물자를 주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던 차에 그해 겨울 성탄 때는 운송관계로 구호물자를 싣고 오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때문이었는지 성탄과 같은 대축일에 신자들이 참석하지 않는 강당에서 큰 축일을 보내야 했다. 얼마나 마음이 허전했는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몇몇 예비교우들과 함께 성탄축하를 지내고 다음 날부터 사목 방법을 바꾸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먼저 기존의 신자들은 상대하지 말고 예비신자 중심으로 새로운 신자들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울릉도에는 겨울철이 되면 온 섬이 눈으로 덮인다. 때문에 겨울은 고기잡이도, 농사도, 또 심지어는 산에 나무하러 가는 것조차도 못한다. 그러므로 겨우 내내 집안에 들어앉아서 윷이나 치고 노름이나 하는 것이 겨울철 소일거리였다. 그래서 이 시기를 이용하여 예비교우들에게 매일 교리를 가르치고, 그 예비교우들을 앞세워 새로운 예비교우들을 찾아 나섰다. 이렇게 해서 겨울 동안 새로운 예비신자, 즉 새로운 구도자 50여 명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해 성신강림절(성령 강림 대축일)에는 새로운 영세자 30여 명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전 가족이 함께 세례 받은 집안이 세 가호(家戶)나 되었다.
이렇게 처음으로 새로운 기틀을 잡고 나니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그 다음 해 성탄 때는 청년들과 부인들을 합하여 모두 50여 명의 영세자들을 맞게 되었는데, 정말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때부터는 이 작은 강당이 비좁기 시작했으며, 미사 한 대로는 부족하여 주일에는 두 대의 미사를 지내고 아동미사(어린이미사)도 따로 지내게 되었다. 집이 작으니 교우들 입에서는 새 성당을 마련해야 하겠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임시로라도 큰 강당이 있어야 하겠다며 야단들이었다. 그래서 일부 새로운 성당 대지를 마련하고는 대구 군부대를 찾아가서 군용 막사(幕舍)를 구해 와서는 앞마당을 닦고 또 임시 강당까지 마련하였다.
도동성당 신축
울릉도는 섬 전체가 바위산으로, 흙이 많지 않고 바다가 깊어서 성당을 짓기 위한 모래가 아주 부족하여 공사에 필요한 모래 구하기가 가장 힘든 일로 다가왔다. 말이 성당이지 막상 성당을 건축하려고 생각하니 막연하기만 했다. 목재며 시멘트, 게다가 못 하나까지 대구나 부산 등지에서 구입하여 배로 운반해야 했다. 또 기술자들도 모두 대구에서 데리고 들어와야 하고, 그 많은 일꾼들의 식사를 시켜주어야 하고 잠도 재워주어야 하니 정말 이런 일을 처음 당하고 보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어려운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모래에서부터 자갈, 목재, 철근 등 기타 모든 것을 교우들의 등으로, 머리로 새로 마련된 성당까지 운반해야 했다. 그 경사가 거의 35도나 되는 성당 부지를 닦아야 했으니 교우들의 고생도 말이 아니었고, 일을 시키는 입장에 있는 나의 고민도 대단히 큰 것이었다.
맨 처음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집을 좀 수리하려고 하다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앞서 말한 바 있듯이, 이렇게 큰 공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의 고민에 대해서는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좌우지간 성당 신축을 위하여 처음 이 섬에 들어올 때부터 서두른 탓으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북부 지방 등에서는 벌써부터 원조금을 보내왔었다. 그리고 주교님(당시 7대 교구장 故 서정길 요한 대주교)께서도 이미 성당 신축을 허락하셨으니, 이젠 시작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1961년 가을부터 바다에서 끌어 모은 모래를 밀가루 포대에 담아, 한 포대씩 성당 신축 마당까지 들어올려 오는 대가로 밀가루 5되씩 셈하여 주기로 하고 교우들에게 모래를 올리도록 했다. 가을 내내, 겨울에도 그리고 봄 내내 모래를 모아서 1962년 여름에 벽돌 기계를 사서 교우 부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서 벽돌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을까지 시멘트 벽돌 30만 장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교우들 중 일부는 성당 대지를 닦는 정지(整地) 작업을 했다. 물론 1962년 봄 역시 일부 신자들에게 모래 올리기 작업을 시켜 모은 모래로 성당 기초와 골조 작업을 했었는데, 이때는 모래가 너무 많이 들어서 포항에서 큰 배에 모래를 실어 와야 했다. 이렇게 해서 가을에 성당은 2층으로 골조만 올리고 1층 사제관과 35평짜리 강당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탄 전에 그 적산가옥에서 새로 마련한 사제관으로 이사를 하고, 미사도 35평 강당으로 옮겨 집전하였다. 이때 지은 건물이 당시 울릉도에서는 처음 지은 콘크리트 집이고 또 울릉도에서는 제일 큰 집이었으니 그 경이로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미 완성된 집에서 그해 겨울 동안에는 정말 눈코 뜰 시간 없이 분주하게 보냈다. 대인(어른) 예비신자가 600명, 하루에 7시간씩 교리를 한다고 해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봄 부활 때는 세 차례 세례를 주었는데, 영세자가 300명에 달했다. 또 그해 겨울에는 채 완성되지 않은 성당에서 청년들이 성극(聖劇) ‘피에 젖은 백합’이라는 순교사극을 공연하여 3일간 대성황을 이루었다. 성탄 후 예비신자들 중에는 이 성극을 보고 감동을 받아 성당에 나왔다는 사람도 많이 있었으니, 성극의 효과는 크다고 보아야 되겠다. 울릉도에는 극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유사 이래 그런 대규모의 극 같은 것을 구경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성당 신축과 함께 울릉도의 성당에도 성령의 바람이 크게 일었다. 예수교회(개신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개종을 하는 바람에 예수교인들이 몰려와서 “교인 아닌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는데 왜 남의 교인을 데리고 가느냐?”며 성당 앞에서 데모까지 했을 지경이었다. 그 돌풍은 울릉도의 기류를 바꾸어버린 것 같았다. - 다음 호에 계속
* 자료사진을 보내주신 울릉도 도동성당 양재영(제르바시오) 사무장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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