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해선리 316-1번지. 고경 파출소와 고경 우체국 사이에 위치한 산수유꽃이 활짝 핀 작지만 아담한 공소. 새 하늘·새 땅을 여는 빛 애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난해 ‘사목실습’에 이어 올해는 ‘신학생 복음화 과정’이라는 새로운 이름 아래 영천성당 고경공소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호 안셀모입니다. 제가 생활하고 있는 이곳은 40여 명의 신자 분들께서 작은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공소가 그러하겠지만 이곳 역시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주축이십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또 실천하는 이번 신학생 복음화 과정을 통해 각자 나름대로 많이 성숙하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훗날 사제로 살아가는 데에 훌륭한 밑거름으로 사용되면 좋겠습니다.” 복음화 과정 시작 전 만나 뵌 최영수(요한) 대주교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주님께 아뢴 이사야 예언자의 열정으로 살아보고자 첫 발을 내디딘 지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새로이 서품된 새 신부님들께서 처음으로 사목 현장에 나가실 때 마음가짐이 어떨까?” 항상 궁금하게 여겼었는데 이번 신학생 복음화 과정을 통해 그 마음가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소에서의 모든 일들은 말 그대로 제 자신이 직접 계획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처음 이곳에 와서 첫 주일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이곳에 신자가 열분 안팎인 줄 알았습니다. 일주일을 지내는 동안 딱 두 분만 뵈었으니까요. 그리고 처음 맞이하는 주일, 이곳 공소는 한 달에 한번 신부님께서 오셔서 봉헌하는 미사를 제외하고는 매 주일 공소예절로 미사를 대신합니다.
사순 시기 동안 십자가의 길로 시작하여 공소예절 그리고 레지오 회합까지, 길어야 두세 시간이 일주일 모든 일의 전부입니다. 공소예절을 진행하면서 주일 강론도 하고 레지오 훈화, 간단한 교리공부도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주일 하루에 몰려있어 주일을 제외하고는 다시금 시골 마을의 단조로움에 빠져들기 일쑤입니다. 복음화 과정 시작 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계획(한 신자 한 예비신자 가지기 운동, 나도 성경 읽을 수 있다! -한글학교, 레지오 단원 2배 만들기, 신자 교리 재교육 등)들을 평일에 시행해보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신자 분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곧 농번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이제 주일에 나오는 것도 힘이 듭니다.”라는 대답뿐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운 한편 몹시 서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머리 안에서 한순간에 백지가 되면서 처음 시작할 당시의 열정들이 조금씩 꺼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드리고 싶은데 거저 준다고 해도 싫으시다면, 뭐 당신들 손해지.” 이렇게 시작 당시 열정은 마음속 한쪽으로 밀려나고 나 자신을 위한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
지난 어느 금요일 화장실을 나서는데 성당에서 귀에 익은 노래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였더니 십자가의 길 기도 때 처를 이동하며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자전거 한 대가 공소마당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조심스레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더니 할아버지, 할머니 다섯 분께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계셨습니다.
조용히 들어가 그분들과 함께 입을 모아 기도를 끝내고 나오는 저의 머리에 ‘십자가의 길은 주일에 모두 함께 했었는데’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분들을 방으로 모셔 다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기도하려고 지나가던 길에 잠시 들렀습니다. 학사님이 공소 앞에 써놓은 계획 잘 보았습니다. 참 좋고 우리도 함께 하고 싶은데 집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고 농삿일 하는 사람들이라 차가 없으면 한 시간에 모이기가 어렵습니다.” 말씀을 다 듣고 나서 생각해보니 ‘언제고 기도가 그리우면 공소를 찾으시는 신앙이 삶의 일부분이 되신 이 분들께 신앙 외(外)적인 부분은 생각하지 못하고 너무 내 기준으로만 생각했구나.’싶었습니다. 그동안 잘 알지 못하던 부분을 알게 되었고 다시 희망을 가지고 접어두었던 계획들을 꺼내어 조금씩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많은 계획들은 아직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이제 그 방법을 제 자신의 방식대로가 아닌 신자 분들을 위한 방식으로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곧 시작될 농번기로 바쁠 때에 공소에 못 나오시는 신자 분들은 제가 직접 논으로 밭으로 나가서 그분들의 일손을 도우면서 함께 기도도 하고 교리도 설명해주면서 말입니다. 이곳에서 제가 무슨 대단히 큰일을 해낼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누룩의 비유처럼, 이곳 신앙 공동체에 열정이라는 누룩을 집어넣어 그것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따름입니다.
그동안 못자리에서 머리로 배워 익힌 신앙에다가 이곳 신앙 공동체의 신자 분들은 고통을 통한 생활 속의 신앙을 더해주십니다. 제가 신자 분들을 도와드리러 왔지만 지금까지 배우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하면서 저는 이런 기도를 드려봅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고 가르쳐주신 아버지 하느님, 부족한 당신의 아들이 당신의 사랑을 이곳에 실천하려고 합니다. 머리로 배워서 익힌 신앙뿐만 아니라 삶이라는 은총 안에서 고통을 통해 얻은, 기쁨을 통해 얻은 신앙을 더하여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다만 이 모든 것이 저의 뜻이 아닌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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