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싸운 공소 길
묵주신공을 달아서 몇 단씩 하곤 하였다. 공소를 순회(巡廻)하는 즐거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성당 신축 하느라고 대지 정리를 하고, 벽돌을 찍고, 모래를 운반하고, 재료를 운반하면서 단결된 신자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교하는 것으로 이어져 전력을 쏟아 부으니, 그야말로 잘 지펴진 불과 같았다. 한번은 눈이 많이 내리는 성탄 직후의 겨울이었는데, 남자들만 20여 명 남짓 기다리는 공소에 가야 했다. 보통 공소 순회는 성탄 전에 마치곤 했는데, 그 해는 성당 신축 때문에 공소 방문을 미처 다 마치질 못하였다.
공소 방문을 하려는 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당을 출발하려고 할 때는 주먹만큼이나 큰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마구 쏟아져 내렸다. 정말 말 그대로 눈앞이 보이질 않을 정도였는데, 갑자기 신자들이 몰려왔다. 공소에 가지 못하도록 만류하기 위해 온 것이다. 본당 회장의 말로는 7,8년 전에도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목사 한 분과 전도사 한 분이 북면(北面)에 가서 전도하고 돌아오다가 지금 신부님이 지나가야 할 석포 고개 위에서 눈에 빠져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공소방문 날짜를 변경하여 다음 날로 미루라는 것이다. 나는 아무려면 그렇게 심하기로서니 사람이 설마 눈에 빠져 죽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기어코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랬더니 교우들이 절대 안 된다고 우기면서, 그래도 꼭 떠나시려거든 많은 남자 교우들을 동원해서 설피(雪皮,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에서 눈이 깊은 곳을 다닐 때 신발 바닥에 대는 칡이나 노 따위로 넓적하게 만든 물건)를 신고 가야 한다고 했다. ‘설피’라는 말은 그때 처음 들었다. 좌우지간 설피를 동원하든지, 신자들을 동원하든지 꼭 가야겠으니 서둘러 달라고 일렀다.
이윽고 본당의 비오회장, 전회장(본당회장), 김씨 그 외 교우 두 분 등 장정 5명이 몸가짐을 가볍게 하고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나를 따라 나섰다. 그때는 아직 수녀들의 집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녀님은 부임하지 않은 때였다. 이렇게 6명이 눈 속을 향해 본당을 출발했으니, 가야 할 길은 약 12km, 1963년 12월 29일 오전 10시경의 일이었다.
가는 도중에 ‘저동’이라는 곳에 공소가 하나 있었으므로, 우리 일행 6명은 그곳에 들러 점심 겸 요기를 한 다음 거기서 설피를 준비하여 다시 산 고개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가는 길은 이미 수십 번 다녀 본 곳이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지형을 다 아는 곳이었으나, 좁고 꼬불꼬불한 데다 경사가 평균 35도나 되는 가파르고 아주 험한 산이다. 거기다 지금은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으니 정말 무리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산정으로 올라가는 골짜기를 지나 오르막길로 접어들자, 앞서 가던 전회장이 돌아서면서 “신부님, 이건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며 자신 없는 말을 건넸다. 길은 아직도 20리 남짓 남아있고, 지금부터는 큰 산을 세 개나 넘어야 하는데 눈은 계속 퍼붓고 있는 데다 이미 눈이 쌓여 길을 분간 못할 지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눈이 쌓여 벌써 오금(무릎이 구부러지는 다리의 뒤쪽 부분. 뒷무릎)이 넘도록 빠져 들어가니 설피로 만들어 놓은 호박길을 겨우 찾아 따라가는 발걸음 또한 너무 느려서 전진이 매우 힘들어졌다. 게다가 앞서 설피를 신고 가던 김씨가 힘이 들어서 추위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으니 모두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산으로 올라갈수록 눈은 더욱 심하게 퍼붓고 있었다. 눈에 대한 상식이 없는 데다, 또 눈이 얼마나 더 많이 올 것인지 판단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서 이까짓 눈길 하나 못 뚫고 가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였다. 한 젊은 청년이 이 험한 산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발에는 설피를 신고 있었고, 뒤에는 젊은 부인이 따라오고 있었다. 아마도 처가에 다녀오는 젊은이인 것 같았다. 우리가 이 눈길에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 젊은이는 자기 집은 이 첫 산을 넘어 조금만 가면 외딴 집이 한 채 있는데, 그곳이 자기 집이라고 대답해주었다. 우리가 당신 혼자서 이 산을 넘어 갈 자신이 있느냐고 물으니, 이까짓 것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 부인과 함께 앞서서 가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도 용기를 얻어서 그까짓 것 우리도 저들의 뒤를 따라가면 되겠지, 만약 그 이상 더 못 가겠으면 저들의 집에 가서 잠시 쉬어가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뒤이어 전진하여 갔다.
그런데 산 위로 올라갈수록 눈은 더 많이 쌓여 있고, 눈송이는 더욱 커져 갔으며 더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 온 천지가 눈에 덮여 있었다. 소나무들이 눈에 덮여 조금의 굴곡을 이루고는 있으나, 나무와 땅을 구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산에서 좀더 올라가면 ‘나리’라는 공소가 있는데, 겨울에는 눈이 지붕 위에까지 쌓여서 집들은 완전히 눈으로 뒤덮여버려 평지와 지붕을 구분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눈 속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런 반면에 평지의 눈 위에는 집집마다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하나는 부엌에서 밖으로 나오는 눈 사다리 구멍이고, 다른 하나는 온돌방에서 밖으로 나오는 눈 사다리 구멍이라고 한다. 겨울에 그 동네 사람들이 이웃집을 찾아갈 때는 먼저 그 구멍을 내려다보며 “이 구멍이 암굴이요, 숫굴이요?” 하고 물어본 다음에 눈 사다리를 내려가서 그 집의 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곳 울릉도의 눈의 양이 얼마나 많은가를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산중허리에 들어서니 정말 이야기로만 듣던 눈의 양의 위력을 비로소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설피가 만들어 준 호박 눈길을 따라가는 데도 크나큰 어려움이 뒤따랐다. 설피라는 것은 대나무를 엮어 폭 30cm, 길이 40cm 정도의 크기로 만든 스키 모양의 신이다. 이렇게 폭이 넓은 신으로 눈을 눌러 놓으며 푹푹 빠지는 길을 만들어 놓는다. 넓은 면적으로 눈을 누르고 밟기 때문에 눈 속 깊이 더 내려가지 않더라도 체중을 눈이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넓은 신을 신고 눈 속에 들어갔던 발을 빼 올리고 또 다시 눈을 밟아 가야 하니 보통 신을 신고 걸음을 걷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다섯 명이 설피를 교대해가면서 눈길을 걸어 올라갔으나 모두 지쳐 있었다. 나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걸었는데, 설피의 압력보다 작은 면적으로 눌러서 아주 가볍게 발을 올려놓고 걸어야지 만약 조금이라도 발에 힘을 주었다가는 그만 발이 더 깊이 푹 빠지고 만다. 빠졌다 하면 배꼽 언저리까지 눈 속으로 들어가야 하니, 그 얼마나 고역이겠는가. 몸 하체는 눈에 젖어서 물에 빠진 사람과도 같았다. 이미 다리는 감각이 없을 정도로 마비가 되어 이제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는 문제였다.
간신히 일행이 첫 산고갯길에 올라섰을 때 바람은 눈보라가 되어 사정없이 얼굴을 내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보라는 산등성이 뒷면에까지 쌓여서 길 또한 전혀 구별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올라온 길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눈 속에 한번 빠졌다 하면 머리까지 푹 들어가 버린다. 빠지고 나면 눈 속에서 눈을 다지고 눈 위로 다시 올라와야 하니 이것이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제는 설피도 소용없고 전진도 불가능해졌다. 다시 후퇴할 수는 있을까. 그것도 이제는 불가능해졌다. 올라온 길 그곳도 우리들의 발자국 하나 흔적이 없이 사라져버렸고 눈은 계속 극성을 부리며 내리쏟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일행은 이제 한발자국의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도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의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죽음의 그림자가 아롱아롱 했던 모양이다. 추위가 온 전신을 무섭게 파고들었으며, 하체는 마비되어 감각이 없었다. 입술은 파랗게 변하여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몸은 와들와들 떨며 신들린 것 같았다. 누군가 눈 위에 누워있는 사람을 강제로 일으켜 세우며 ‘모두들 정신을 차리시오. 몸 운동을 해야 합니다. 지금 눕는다든지, 앉는다든지 하면 다리가 즉시 마비되어 얼어버립니다.’라고 말했다.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이제 살아갈 길은 죽음을 각오하고 전진을 하든지 이곳에서 정지한 채 눈을 헤치고 나무를 꺾어다가 불을 지피든지 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다 어려운 난관에 부딪혔다. 첫째, 우리가 사력을 다 했지만, 그 후 10미터도 전진하지 못하고 말았으며, 둘째, 눈을 헤치고 불을 지펴보려고 했으나 마른 나무를 구할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눈 속에서 푸른 솔가지를 꺾어 모으긴 했으나 거기에 불을 지필만한 불살개가 없었다.
옷은 이미 다 젖었고, 공소 가방 안에는 얼마의 종이와 더불어 교적부, 경본 등이 두 권 그리고 제의가 있을 뿐이었다. 이것으로 푸른 나무에 과연 불을 지필 수 있을지가 문제이며, 무엇보다 이렇게 계속 눈이 오고 바람이 불어오는 상황에서 성냥불 하나 켜내지도 못하겠으니 방법은 완전히 막혀버린 셈이다.
우리는 가방 속에 있는 한 병의 소주를 나누어 마시고는 6명이 서서 서로의 어깨를 짚고 둥글게 스크럼을 짜서 빙빙 돌며 남은 힘을 다하여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기로 했다. 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어 내가 선창을 하고 교우들이 답을 했다. 묵주신공 15단을 마치고 나서 나는 죽음에 임박한 교우들에게 죽음에 대한 각오를 하도록 설교했다.
“아마 우리는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로 기적을 주시기 전에는 눈 속에 쌓여, 그 몇 해 전에 눈 속에 파묻혀 죽었다는 목사 일행의 뒤를 밟아 하늘나라에 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설령 오늘 우리가 이렇게 눈 속에 묻혀 죽는다 해도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대로 죽는다면 그야말로 순직인 것입니다. 이러한 공소 길에서 눈에 쌓여 죽었다고 하면 그것은 치명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어차피 우리는 한번 이 세상에 왔다가 한번은 하느님께로 가야하는 길, 조금 더 일찍 하느님께 가나 아니면 뒤에 가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가 죽어 갈 수 있다면 복된 죽음인 것. 비록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새로운 영세자를 찾아가다 여기서 끝나겠지만 이미 이 길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길, 그러므로 우리는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길에서 죽게 되면 틀림없이 우리의 영혼은 주님과 함께 하여 이 울릉도 신자들의 모범이 될 것이며, 그들의 간성(懇誠, 간곡하고 정성스러움)이 되어 우리의 죽음이 울릉도 천주교회의 거름이 되고, 장차 이 섬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여 도민들의 번영이 크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가족과 세상의 일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고 마음을 가라앉혀 죄를 뉘우치고 고백과 통회의 눈물을 흘립시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죄스러운 이 세상의 삶에서 영원한 천국에로 우리를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 다음 호에 계속(본문 사진-울릉도 도동성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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