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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기(氣)
성사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


조현권(스테파노)|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2. 개별 성사들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

마. 병자성사 :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성사
* 예수님의 병자치유와 그분의 명령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은 많은 경우에 ‘병자에 대한 치유’였다. 예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과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낫게 하시고, 아울러 그들의 믿음을 강조하시거나, 치유를 위해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셨고 그들을 회개에로 부르셨다. 그분의 치유는 구원의 표지로서, 하느님의 자비를 통하여 베풀어지는 죄의 용서와 연결된 행위였다. 이는 병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임무였고, 이러한 임무는 병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에 대한 추종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수난의 길일 수 있고, 특히 병고(病苦)의 길일 수 있으니, 어떠한 경우라도 그 길은 죽음으로써 사멸에 이르게 될 [그리하여 마침내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될] 길인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선포의 임무 외에도 병자들에 대한 치유를 명하시고 그에 대한 권능도 함께 주셨다.(마태 10,1.7-8) 그분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에서 심지어 자신을 병으로 앓는 사람과 동일시하셨고(마태 25,31-46), 병자의 방문을 이웃사랑의 한 실천으로 여기셨다. 이렇게 교회의 병자성사는 그 원천과 모범을 예수님의 선포와 행위에 두고 있다. 이에 상응하여 병자성사를 위하여 봉헌된 기름을 축성하기 위한 감사기도가 바쳐진다. “우리의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의 병고를 덜어주시려 하신 천주의 외아들 성자님, 찬미받으소서.”(병자예식, 75항)

* 성령의 은총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야고 5,14-15)

원시교회는 병자들을 위하여 봉사하였으며, ‘병자의 도유’, 곧 ‘병자성사’를 베풀었는데, 이 성사에서는 도유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성서적으로 볼 때 기름을 바름을 뜻하는 도유는 ‘영(靈)의 바름’이니(1사무 16,13; 루카 4,18 참조), 기름을 바르는 도유는 성령청원기도로써 요청되는 성령을 통하여 그 힘을 갖는다. 그러므로 병자를 치유하고 굳세게 하는 구원을 위한 도움을 베푸는 병자성사의 작용은 성령의 은총에서 나오는 것이다. 병자성사는 성령의 은총을 통한 병자를 위한 도움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때 성령께서는 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그의 영혼을 일으켜 세우시며 굳세게 하시고, 그리하여 병자가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헌신할 수 있도록 하신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분명히 말하였다. “병자성사의 내용은 성령의 이러한 은총으로서, 성령께서는 도유를 통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아직 속죄 중인) 위반이나 과실과 죄의 찌꺼기를 없애주시고, 병자의 영혼을 일으켜 세우신다.(까논 2) 이는 성령께서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크나큰 신뢰를 일깨워주심으로써 이루어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병자성사의 전례문은 병자성사가 성령의 은총의 성사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천주 성령님, 찬미받으소서. 주님, 당신 종에게 이 성유를 바르오니 그의 고통을 덜어주시며 그의 약한 마음을 견고케 하소서.”(병자예식, 75항)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주소서.”(병자예식, 76항)

그리하여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마침내 병자성사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바. 성품성사 : 성령을 통한 사도적인 봉사의 성사
* 성령강림과 교회의 사도적인 봉사
교회 안에서의 사도적인 봉사의 직무는 ‘성품’의 성사와 밀접히 관련되어있다. 왜냐하면 봉사의 직무는 예수 추종에 있어서 확실한 요소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령강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시자 ‘참된 사도들’(세상에 파견된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봉사직무를 성령의 선물로 보았다. 그러기에 이 성품의 본질적인 부분은 처음부터 주교를 통한 안수로서, 이는 하느님의 영이 내리시길 청하는 뜻을 지닌 행위였고(사도 8,18 참조), 이렇게 성령을 통하여 직무의 행사가 최종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목자(주교)들에게는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전하는 증언(로마 15,16; 사도 20,24 참조) 그리고 성령과 의화의 영광스러운 봉사 직무가 맡겨졌다.(2고린 3,8-9 참조)

이렇게 중대한 임무를 다하도록 사도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내려오시는 성령의 특별한 분출로 충만해졌다.(사도 1,8; 2,4; 요한 20,22-23 참조) 사도들은 자기 협조자들에게도 안수를 통하여 영적 선물을 전해 주었으며(1디모 4,14; 2디모 1,6-7 참조), 그것은 우리에게까지 주교 축성 안에서 전해 내려온다.”(교회헌장 21항)

안수를 통하여 서품 후보자들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축성된 이들은 마침내 자신의 특별한 봉사의 직무를 행사하고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러한 안수는 단지 부수적인 동작이 아니라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을 현실화하는 표지이며, 결국 교회의 봉사직무에 대한 자격을 주는 것이다.

*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교회의 서품
성품성사는 교회에 맡겨져 있다. 그러나 교회는 서품을 제 마음대로 혹은 함부로 베풀 수 없고 항상 주님의 뜻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한다. 

“(성품성사에 대한) 교회의 허가조건은 교회가 마음대로 규정할 수가 없는 것으로서, 성령의 활동을 억압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 성사의 수령자 스스로가 성품성사를 받을 수 있기 위해 하느님의 활동에 자신을 내맡겨야 하고, 그분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하며, 하느님 영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성품성사 안에서의 성령의 인도하심은 그 성사의 예식문 안에 나타나는데, 주교서품 때의 강론을 위한 예시는 다음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성부께서 파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부어주시어 열두 사도들을 친히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모든 민족을 모아 거룩하게 하며 다스리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이 임무를 세상 끝까지 지속시키고자 협조자들을 뽑아, 그리스도께 받은 성령의 은사를, 안수를 통하여 그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 안수는 성품성사를 완성시켰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교직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온전히 계승되었고, 구세주의 구원 업적은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보존되고 성장하였습니다.”(서품예식, 75항)

사. 혼인성사 : 성령 안에서의 사랑의 공동체의 성사
* 성령 안에서의 사랑의 공동체
‘혼인’은 자연적인 창조의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서, 성(性)적인 공동체에 기인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친교이다. 혼인에 내포된 사실은, 특히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공동체에서 유래하고, 공동체에서 성장하며,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인 혼인은 처음에는 고대의 유대교적이고 이교적인 혼인예식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의 혼인은 ‘주교의 동의’로 이루어지도록 되어있었으니, 이는 욕망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뜻에 따르는 혼인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하여 고대 교회에서는 신부에 대한 축복과 성찬례가 결혼식에 포함되었다. 그 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유효한 혼인은 세례를 받은 두 명의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행해지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베푸는 일곱 성사 중의 하나인 성사임이 분명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교회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풍요로운 사랑과 일치의 신비를 드러내고 그 신비에 참여하는 혼인성사의 힘으로(에페 5,32 참조), 그리스도인 부부는 부부 생활은 물론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하여 성덕에 나아가도록 서로 도와주며, 또한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서 자기 생활 신분과 영역에 고유한 은총을 받는다. 실제로 이 혼인에서 가정이 생겨나고, 가정에서 인간 사회의 새로운 시민들이 태어나며,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그들은 하느님 백성을 역사의 흐름 속에 영속시키도록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교회헌장 11)

그러므로 혼인을 통하여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의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생활 공동체를 이루는데, 가톨릭적인 이해에 따르면 이 사랑의 생활 공동체가 성사이다. 이 공동체에 사랑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그분께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그 안에서 일하시고, 공동체적인 생활을 위하여 당신의 은총을 선사하신다. 이미 세례 때에 오시어 계시고, 하느님과의 사랑을 시작하는 공동체를 선사하신 성령께서 계속 도움을 주시어, 혼인의 공동체가 사랑 안에서 지속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사람 안에서의 하느님의 내주(內住)와 하느님과 인간과의 살아있는 만남을 선사하시는 하느님의 영께서 혼인의 공동체 안에 머무르시면, 혼인의 남여는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그들 안에 계신다. 이러한 관점에서 혼인성사의 주례자는 혼인을 확인한 후, 신랑·신부에게 팔을 펴들고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저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비오니, 당신 성령께서 이들에게 일치를 선사하시고, 이들 생활의 계약을 거룩하게 하소서. 성령께서 이들의 사랑을 모든 위협에서 지켜주시고, 그 사랑을 자라게 하시며, 열매를 맺게 하시고, 모든 선한 것을 서로 추구하게 하소서.”

* 혼인성사의 집전자
서방교회는 혼인의 성사가 혼인당사자들 자신에 의해 베풀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혼인을 체결하는 전례에서 혼인하는 남녀 간의 의식적인 동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혼인성사는 혼인의 체결에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혼에서 시작하여 혼인생활 전체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다. 혼인의 남녀가 계속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들은 계약을 굳게 지키는 것이고, 지속적으로 혼인의 성사를 베푸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혼인의 성사는 ‘지속의 성사’ 혹은 ‘생활의 성사’로 표현된다. 그래서 혼인은 “참된 성사이고 생활한 상태로서의 성사”이다. 이 지속의 성사를 위해서 성령 안에서의 하느님의 축복이 필수적이니, 혼인 체결은 성령의 임재를 청하는 기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서방교회에서 혼인당사자들에 의해 베풀어지는 혼인성사가 강조되는 반면, 동방교회의 혼인 이해에 있어서는 혼인을 주례하는 사제에 의해서 혼인성사가 베풀어진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동방교회에서는 사제가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께서 내려오시기를 청하는 기도로써 혼인이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제는 혼인의 자연적인 끈을 거룩하게 한다. 그는 혼인남녀의 손을 서로 포개놓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그 기도를 통해서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은총을 전달하며, 혼인을 들어 높이고 성사의 품위로 축성한다.”

“서방교회가 […] 혼인당사자들을 혼인성사의 집전자로 여기는 반면, 동방교회는 사제를 혼인성사의 집전자로 여긴다. 동방교회에 의하면, 사제는 (그러기에 포기할 수 없는) 전례적인 행위 안에서 - 혼인당사자들의 혼인의지로써 이루어진 - 자연혼(自然婚)을 성사의 품위로 들어 높이는데, 이는 성령의 임재를 간청하는 축복(혹은 축성)에 의한 것이다.”

결국 성령청원기도를 통하여 혼인이 성사가 되는 것이므로, 혼인을 성사로 만드는 혼인의 참된 집전자는 결혼을 하는 당사자들도, 그 혼인을 주례하는 사제도 아닌 바로 성령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스도와 교회,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혼인
성서와 고대교회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혼인을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혼인과 비교하였다.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풍요로운 사랑과 일치의 신비를 드러내고 그 신비에 참여하는 혼인성사의 힘으로(에페 5,32 참조), 그리스도인 부부는 부부생활은 물론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하여 성덕에 나아가도록 서로 도와주며, 또한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서 자기 생활 신분과 영역에 고유한 은총을 받는다.”(교회헌장 11항)

그리스도의 영이 교회 안에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언제나 다시 죄를 범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신부일 수가 있으며, 신적인 삼위의 사랑이신 하느님의 영께서 사람들에게 오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느님의 신부일 수가 있다. 이렇게 혼인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 안에 하느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표지로서, 사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표지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교적인 혼인을 떠받치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이러한 혼인은 그 자체로 항구하고 신실하게 세상을 향하신 하느님 사랑의 표지가 된다. 신약성서에서 새롭고 영원한 계약으로 표현되는 남자와 여자의 생활 공동체와 하느님과 인류의 생활 공동체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호관계에 있으므로, 한 공동체는 항상 다른 공동체에 의존하고, 한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를 현존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은 부부간의 사랑을 떠받치고 있으며, 부부간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가 된다.” 혼인의 성사가 진실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효과적인 표지로 생활화하는 곳에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인간 안에서 드러나게 나타날 수 있다.

혼인의 사랑은 교회의 결합하는 사랑을 현실화하고, ‘가정교회(ecclesia omestica)’로서 전체 교회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이유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바로 이 가정교회에서 부모는 말과 모범으로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최초의 신앙 선포자가 되어야 하며, 각자의 고유한 소명을 특별한 배려로 육성하여야 한다.”(교회헌장 11항)

성사적인 혼인을 이러한 가정교회로 간주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사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은, 신앙으로 살고, 신앙 안에서 살며, 신앙을 증거하는 삶을 이룬 하나의 성공한 가정을 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은총을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공동체로서, 한 가정 안에서, 드러나게 하셨으니, 이러한 가정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다시금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시 가정 안에서 복음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고귀함도 나타난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적인 영이해와 기의 비교
성령께서는 성사들 안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베푸시는 은총의 중개자로 일하신다. 즉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으로부터의 은총을 선사하심으로써,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신앙을 굳세게 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들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으로써 하느님과 화해를 하고, 고통과 병고에서 치유되며, 동료인간과 교회에 봉사하고, 서로 사랑으로 일치하는 가운데 하나의 생활공동체를 체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교회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가져다주시고, 그들을 하느님과 결합시켜 주신다. - 그런데 이러한 전망은 기개념(氣槪念)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하늘(하느님)과 땅(인간)을 연결하여 결합시키는 것이 바로 기(氣)인 것이다.

거의 3년 반에 걸쳐서 “교회와 신학 안에서의 성령의 망각”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의 성령의 재발견”에 관하여 알아보았다. 그간의 고찰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특별히 생명력 혹은 삶의 힘으로 이해되시며, 그분께서는 먼저 교회와 신학(특히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 소홀히 여겨졌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전·후해서 재발견 되셨다.

이 글 제목이 “성령과 기(氣)”인데. 그동안은 성령에 대하여 알아보았고, 다음 호부터는 교회적인 영이해(靈理解)를 위한 토착화(土着化)개념인 “생명력으로서의 기개념”을 통해서 성령께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의 폭을 넓혀보고자 한다. 이리하여 극동 아시아의 성령론을 위한 토착화개념으로서의 기개념은 생명력이라는 관점에서 약화된 성령의 의미를 다시 강조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