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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이야기(1)


박경현(프란치스코) 무학고등학교 교사, 진량성당

‘시험’ 이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이 멈칫함을 느낀다. 사실 평가의 본래 의미는 그렇게 두렵거나 피하고 싶은 것이 결코 아닌데 말이다. 교육은 사람들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 특성이나 장점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계획에 필요한 정보들을 얻기 위해서 평가는 매우 중요한 교육의 과정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평가는 본말이 한참이나 뒤바뀌어 있다. 평가가 교육의 수단이 아니라 교육이 평가를 위하여 존재하는 기현상이 일반화 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런 기형적인 변화는 평가의 결과를 선발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시험이 예고되면 자신의 일상은 정지되고 불면의 밤이 반복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토록 예민한 업무인 평가가 지금은 대부분 전산화 되어 짧은 시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처리된다.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교단에 섰을 무렵만 하더라도 채점은 물론 통계를 내고 서류를 작성하는 모든 과정이 수작업이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원시적이라 할 만큼 힘들고 더딘 업무였지만, 현재의 빠르고 편리해진 만큼의 대가로 희생된 소중한 측면들이 있었음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채점을 위하여 아이들의 답안지를 꼼꼼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지금과 가장 큰 차이이다. 거기에는 컴퓨터용 정답 카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느낌들이 있다. 아이들이 제출한 답지에는 무심한 부호와 같은 응답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채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오를 판별하여 점수를 부여하는 작업 이상이 된다. 일상적인 만남으로 접할 수 없었던 아이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통로가 되어, 그들의 묻혀 있는 삶의 한 여정을 보게 된다는 뜻이다. 

이미 예상했던 문제라는 듯 자신감 넘치게 기입한 아이의 답안에는 그 아이의 미소와 희망과 스스로의 능력을 확인한 기쁨이 넘친다. 색연필을 꾹 눌러 그려준 나의 힘차고 큰 동그라미는 단순한 채점의 결과만이 아니다. 그의 의지와 노력에 대한 격려와 응답이 되어 자신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답안지엔 자신의 예측을 빗나간 문제들에 대한 뜨거운 탄식과 애환이 가득하다.

이번만은 비록 단 한번만이라도 자신의 한계를 넘고 싶은 바람으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막상 시험지를 펴는 순간 화공약품이 증발하듯 하얗게 변해 버린 머릿속은 시험시간 내내 회복되지 않는다. 이 시험을 위하여 노트와 책들이 연필자국으로 덧칠되어 글씨가 보이지 않을 만큼 애를 썼건만 머리는 온통 헝클어진 실타래가 되어 버린다.

가장 싫어하지만 그래도 공부해 둔 세계사만 해도 그렇다.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인 듯, 숱한 전쟁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인한 즐비한 영웅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이 지구상의 그 숱한 사건들과 망하고 흥한 수많은 나라들의 이름들, 현인과 의인보다는 권력을 향한 온갖 음모와 반목들로 얼룩진 역사들을 차라리 잊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기억을 떠 올려 주어진 그 어느 한 항목에 표기를 해야 하는 처지가 서글퍼진다. 텅 빈 머리와 연필을 이리저리 굴리다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본다.

동료들의 숨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이 숨 막히는 교실 안과는 달리 창밖은 딴 세상이 펼쳐져 있다. 황사가 사라진 파아란 하늘이 아름답고, 훈기가 가득한 봄바람에 유채꽃과 민들레는 겨울의 추위를 견딘 탓에 노오란 속살이 더욱 눈부시다. 아주 잠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지만 얼른 정신이 들면서 지금은 시험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마치도 무슨 마법에 걸린 듯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어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데 시간은 시한부 삶의 종착점를 향한 시계바늘 마냥 치열하게 다가가고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가슴은 더욱 큰소리로 쿵쾅거린다. 문제를 읽어 볼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답란을 찾아 제 멋대로 그려 넣고는 시험지를 밀쳐 버린다.

한 과목의 시험은 끝났지만 그는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소리 죽여 가슴으로 흐느낀다. 이 한 시간의 시험으로 인해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있는 깊은 좌절감이 시험지에 뜨겁게 묻어 있다. 그는 애쓰고 노력한 시간들에 대한 위로라도 받고 싶겠지만 선생님은 오로지 점수로만 추궁할 것이기에 더욱 서러운 것이다. 달려가 선생님에게 매달리며 결코 답안지에 드러낼 수 없었던 자신의  몸부림을 하소연이라고 하고 싶지만, 모두가 무의미 하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수학, 이것은 또 하나의 외국어이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수많은 문자와 낯선 부호들로 가득한 이 과목은 결코 오르고 싶은 엄두가 나지 않은 절벽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덧셈과 뺄셈 그리고 곱셈과 나눗셈 이상의 수학적 지식이 필요했던 기억이 없다. 배우면 배울수록 그 절실함이 떨어지는 이 교과가 대학입시에 큰 비중을 차지 한다는 이유로 너무 무리한 요구를 쏟아 놓는다. 몇몇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듯 보이는 이 난해한 지식을 모든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현실을 피할 수만 있다면 세상 어디에든 떠나고 싶다.

시험지를 받자마자 긴장된 마음으로 훑어본다. 역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두통과 현기증이 일어날 뿐 생각의 갈피는 잡히지 않는다. 연필 사각이는 소리에 소름이 돋는다. 그냥 눈을 감는다. 마음으로나마 훨훨 날아 저 먼 과거로 떠나고 있다. 가만히 되돌아보면 지금은 이토록 고통스런 평가의 시간이지만 그에게도 평가를 받는 것이 그렇게 큰 기쁨이고 환희였던 순간이 있었음이 떠올리며 허허로운 미소를 허공으로 던져본다.

초등학교 1,2학년 시절, 그 때만은 배운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큰 즐거움이었다. 하루하루 배운 것을 부모님께 자랑하면서 학교에 가고 싶어 날이 밝기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숙제장을 받아들 때마다 비밀스럽게 혼자 펼쳐보고는 선생님께서 그려주신 동그라미의 개수를 확인한 후 세상을 얻은 듯 만세를 부르며 자랑을 했던 기억도 뚜렷하다. 또 공책마다에 환하게 웃는 두 아이의 얼굴과 함께 ‘참 잘 했어요.’라는 파란색 스탬프로 찍어 주신 글귀는 가슴 깊은 곳에 새겨져 추억과 함께 삶의 의미가 되기도 했는데….

아직도 주변은 깨어질 것 같지 않은 정적으로 가득하고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시험지에 골몰하고 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가슴을 후비며 꿈틀거리는 후회와 회한들이 가득하지만 이제 되돌리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다. 나는 선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인을 응징하듯이 색연필을 들고 아이의 답안지에 칼질을 했다. 비켜 그어진 칼자국에 핏빛이 선명했다. 하지만 상처를 받고 쓰러지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어지럽게 칼춤을 추고 있는 나의 가슴 구석에도 감출 수 없는  생채기들이 쌓여가고 있었음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들이 필요했다.

이 수수께끼와 같은 단편적인 문항들로 아이들을 점수화하여 한 줄로 세우는 것이 가당한 일일까? 경쟁이 있는 곳에 객관적 선택의 기준이 있어야하고 그 선택을 받기 위하여 선택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의 기준에 의하여 결정된 우열이 다른 기준에 의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너무 가볍게 여긴 것 같다.

인생은 선택형 문항으로 나타내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소중할 수 있는 수많은 기준과 기회들이 주어져 있음을 알게 했어야 했다. 온 마음으로 익히고 암기한 지식의 조각들을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 하여 무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능하다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무능인 것을 꼭 깨우쳐 주었어야 했는데,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평가의 결과가 아니라 평가에 대응하는 나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더더욱 힘주어 말했어야 했는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