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임 안나는 충청도 덕산 고을 높은 뫼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안나는 용모가 아름답고 재능이 비상해서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안나의 집안은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믿음이 깊은 집안이었어요. 안나는 특히 정덕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동정을 지키기로 몰래 결심했어요. 그러나 그 당시 조선사회에서 처녀가 시집을 안 간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도대체 딸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이런 말들이 나온단 말이오.
다 큰 처녀가 시집을 안 가고 혼자 살겠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오?
조상님 뵙기 부끄럽지도 않소?”
“죄송합니다, 어르신.
제가 잘 알아듣도록 시임이를 타이를 테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긴 말 할 것 없소. 더 이상은 문중에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오.
하루 빨리 혼처를 정해 예식을 올리도록 하시오.”
안나는 자기 때문에 가족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계속 시달리는 것이 몹시 마음이 아팠어요. ‘아, 천주님만을 믿고 섬기며 평생을 살고 싶은데 그것이 그리도 잘못된 일이란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 부모님도 더 이상은 내 편을 들어주실 수 없으니….’
고민을 하던 안나는 결국 집을 나오기로 결심했어요. ‘나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처녀들이 함께 모여 동정 수도생활을 하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도 거기로 가야겠다. 비록 부모님께는 죄를 짓는 일이지만 천주님만을 위해 살기로 한 내 결심을 바꿀 수는 없어. 뱃사공인 박 형제님께 부탁해서 길을 좀 안내해 달라고 해야지.’
이렇게 해서 이시임 안나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집을 떠났어요. 그러나 양반 가문의 아름다운 처녀가 혼자 길을 나선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어요. 길을 안내하던 뱃사공 박씨는 안나에게 나쁜 마음이 생겨 안나의 동정을 빼앗고 말았어요. ‘이렇게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평생 동정을 지키며 살기 위해 부모님을 배반하고 집까지 나왔는데 이렇게 되고 말다니!’
이 뜻하지 않은 사고는 안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어요. ‘어쩔 수가 없구나. 이 또한 주님의 뜻이라면 이 사람과 결혼을 하는 수밖에….’
안나는 박씨와 결혼하여 살면서 종악이라는 아들을 낳았어요. 종악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씨는 세상을 떠났어요. 그제서야 안나는 자신이 바라던 대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안나는 아들 종악이를 데리고 진보 머루산 신자촌을 찾아갔어요. 모든 어머니들이 그런 것처럼 안나도 종악이가 건강하고 올바르게 자라기를 바라면서 말이에요. 이곳에 정착한 안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어요.
그러나 그러한 행복도 잠시, 1815년 부활절에 신자촌을 덥친 포졸들에게 붙잡혀 안나는 아들 종악과 함께 감옥에 갇히고 말았어요. 안나는 여러 신자들과 함께 안동 진영에서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었어요. 그동안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지만 안나는 용감하게 믿음을 지켜 결국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어요. 그러나 사형이 집행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의 힘든 감옥생활을 견디지 못 하고 종악이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아이고, 세상에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직 철도 나지 않은 어린것이 어머니를 따라 이곳까지 와서는 결국 이리 되었구나!”
사람들은 모두 어린 종악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어요. 종악이를 잃은 안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어요.
원치 않은 결혼과 아들의 죽음…. 도무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만 계속되는 듯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불행한 현실들은 안나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어요. 안나는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어요.
“종악이가 세상을 오래 살지 않았으니, 그만큼 지은 죄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천주님께서 우리 종악이를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은 천국으로 데려가 주셨으니 오히려 감사한 일이지요.”
1816 년 11월, 드디어 대구 관덕정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어요. 다섯 명의 남자 신자들이 먼저 참수를 당하였지요. 관장은 남은 두 여인 이시임 안나와 구성열 발바라의 참수를 집행하기 전에 이들을 다시 한번 설득했어요.
“자, 이제 남자들은 다 처형되었다. 그러나 너희들 여자야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 저들의 죄에 비하면 너희 죄는 가볍다. 아직 때는 늦지 않았으니 안 믿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너희들을 놓아 주마.”
관장의 말에 이시임 안나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말했어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치를 모르십니까? 관장님 말씀대로라면 남자들은 천상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공경해야 하지만 여자들은 하느님을 공경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 말씀이 소용없으니 저를 법대로 다루십시오.”
35세의 젊은 나이에 용감히 죽음을 선택한 이시임 안나.
비록 약한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뜻과 상관없는 힘든 현실을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꿋꿋이 견디어 내었고, 모진 고문과 혹독한 감옥생활의 고통 또한 장하게 이겨냈어요.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마침내 순교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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