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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길준 신부의 울릉도 사목일기
아름다운 울릉도(3)


고(故) 이길준 신부

눈과 싸운 공소길(2)
그렇게 한바탕 설교를 하고 나니 교우들보다 내 마음이 더 후련하고 가라앉으며 더욱 침착해졌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산울림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들어보니 사람의 소리였다. 그것도 여러 사람의 소리였다. “사람 살려요.”하는 외침이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그 소리의 방향과 그 외침의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비오 회장이 “신부님, 이 소리는 틀림없이 여러 사람이 외치는 소리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전 회장도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눈 속에 갇혀 구원을 청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이 북쪽으로 가는 일행인지, 아니면 북면에서 남쪽으로 오는 일행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전 회장은 울릉도 태생으로, 눈길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저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위험할까요?”하고 내가 물었다. “글쎄요. 그런지도 모르지요.”라는 전 회장의 말에 “그렇다면 우리가 구해주어야 되지 않을까요?”하고 내가 물었다. 옆에서 비오 회장이 우리의 얘기를 듣고 “신부님, 저의 생각에는 저 사람들은 북(北)에서 남(南)으로 오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람들 소리를 들어보니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전 회장도 “맞습니다. 아마도 1Km쯤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얼마 안 가면 산을 안고 돌아가는 모퉁이가 있지요. 그래서 이렇게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비오 회장이 “신부님, 그렇다면 우리도 ‘사람 살려요.’하고 외쳐봅시다.”라고 말 하는 게 아닌가. 내가 “그건 왜요?”라고 하자, 전 회장이 “그것은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는 신호이며 우리도 매우 위험하다는 신호가 되지요.” 그래서 내가 “그게 어떻다는 것이지요.”라고 반문하였다. 그러자 다시 비오 회장이 “저의 생각에는 이렇게 신호를 하고 누가 나서서 양편의 의중을 타진한 다음, 할 수 있으면 우리 모두 한곳으로 모이게 되면 어떤 방법이 생겨날지도 모르니까 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그럼, 어쨌든 한 번 시도해 봅시다.”하고 우리도 소리를 맞추어서 “사람 살려요.”하고 외쳤다. 그랬더니 저편에서 또다시 “사람 살려요.”하는 신호가 왔다.

이 신호는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이 신호는 우리도 모르게 상호 전진의 신호가 됐다. 우리는 무언 중에 필사의 전진을 했다. 가끔 “사람 살려요.”하는 신호가 났고 그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 가까워지는 소리는 희망의 메아리였고, 30분 후 우리는 2~3백미터를 전력을 다해 전진하다가 북쪽에서 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열 명이 넘었고 손에는 눈 쓸개까지 들고 있었으며 몇 사람은 톱, 낫까지 들고 있었다. 전 회장은 곧 그 사람들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산도감이었다. 북면에 출장 갔다가 도동으로 오는 길이었다. 눈이 많이 오기 때문에 앞 동네사람을 사서 눈을 쓸어 가면서 오다가 지친 모양이었다.

좌우지간 더 거리를 좁혀 한 자리에 모이면 어떤 수가 나리라 생각했다. “자, 마지막 힘을 내서 좁혀갑시다.” 다시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약 1시간만에 겨우 3백미터를 뚫고 두 패가 한 자리에 모였다. 한 자리에 모이기는 했으나 그야말로 양쪽 다 죽은 사람들과도 같았다.

저 편 사람은 오히려 종이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아 불을 지피지는 못했으나 톱, 낫이 있어서 생소나뭇가지를 쳐서 모을 수 있었다. “자, 이제 힘을 내며 솔가지를 꺾어 오십시오. 우리는 불살개를 구하여 불을 피워 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미사가방 속에 있는 교적부 등기와 종이를 모두 꺼내어서 불을 지폈다. 눈을 치워서 가로 쌓고 나뭇가지를 꺾어 위를 걸쳐 놓고 불을 지폈다. 처음에는 눈이 묻어 있어 물기가 많아 불이 좀체 붙지 않았으나 일단솔잎에 불이 붙고 나니 그야말로 생솔가지가 기름을 부은 것 같이 잘 타기 시작했다.

임시로 마련된 가옥은 그런대로 눈을 막아 주었으며 사람들은 오들오들 떨면서도 옷을 벗어 말렸다. 밤새도록 눈이 내렸다. 눈 속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펑펑 쏟아지던 눈도 멎고 맑게 갠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몸도 녹이고 눈도 멎어서 우리는 각각 남북으로 갈라져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공소로 향했다. 눈은 그쳤지만 눈의 적설은 우리에게 정말 힘겨운 행로였다.

눈 속을 정신없이 걷다 쉬기를 반복하며 몇 시간을 더 걸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전신의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 눈 속에서 올라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또 누가 외치는 것도 같아 줄을 당겨 보았지만, 사람은 움직이질 않아서 무의식 가운데 나도 뛰어들었다. 이젠 모두 틀렸구나, 싶었다. 그렇게 춥고 떨리던 몸도 이젠 오히려 포근해졌다.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먼저 빠진 사람을 끓어 안고는 그대로 쓰러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끌려 내려가다 한군데 몰려서 빠져나올 기운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이제는 정말 끝났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때 영세자들이 천사들과도 같이 몰려 왔다. ‘마치 하늘 위로 둥둥 떠올라 가는 것만 같았는데, 어쩌면 나 혼자만 올라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같이 가야 될 텐데….’하는 생각을 하는 동안 정신은 점점 더 몽롱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정신을 잃은 후에 다시 깨어나 보니 사람들이 내 주위로 빙 둘러앉아 있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려고 했으나, 온몸이 저리고 아프고 힘이 없어 허우적거리기만 했지 일어 날 수가 없었다. 옷은 한복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공소회장이 눈물을 흘리며 “신부님,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하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예,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묻자, 공소회장은 “신부님, 말씀하시지 말고 더 푹 쉬십시오.” “그런데 지금 몇 시나 됐습니까?” “오후 2시쯤 되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몇 시간을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군요.” “웬걸요. 꼭 만 하루하고 몇 시간동안 정신을 잃으셨어요.”하고 주위에 앉아 있던 신자들이 모두 울면서 대답했다. “신부님, 우리는 신부님이 꼭 돌아가신 줄만 알았습니다.”하며 목 놓아 울었다. “아! 왜 이러십니까?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지 않습니까. 모두들 진정하세요. 나와 함께 오신 분들은 모두 어떻게 됐습니까?”  “그분들도 모두 무사하십니다. 신부님이 제일 심하셨습니다. 어제 오후에 신부님을 기다리다 지쳐 집에 잠시 다니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눈 위에 쓰러져 있는 신부님과 형제님들을 발견해 공소로 모셔왔습니다.”하고 공소회장이 말했다.

얼마 후, 함께 눈 속을 뚫고 온 형제들이 내 방으로 왔다. 모두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했다. 그 후, 얼마가 지나고 나니 몸을 움직일 수 있었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비오 회장에게 세례자들을 모두 모이게 해 달라고 했다. 저녁식사 후에 새로 영세할 사람들과 몇몇 교우들이(이날 이십 명의 남녀 예비 교우에게 세례를 주었음.) 모였다. 예비 교우들에게 영세 찰고를 하고 미사를 지냈다.

세례 받은 사람이나 교우들이 얼마나 감격에 겨웠는지, 그 열기는 그 작은 공소를 불태워 버릴 것 같았다. 눈물과 기쁨이 엉켜 쌓여 마치 천국에라도 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 감격적인 순간은 그 후에도 두고두고 나의 마음속에 깊이 살아남아서, 희생과 고통이 따르는 곳에 기쁨과 즐거움도 크다는 교훈을 주었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교훈도 지금까지 잊어 보지 못한 한 토막 경험이었다. 

다음날 공소 교우들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본당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도 결코 평탄하지 못했다. 교우들은 이 어려운 눈길 속에서 고생하면서 기어코 공소를 떠나 본당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모여서 열심히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교우들의 기도의 힘으로 ‘우리가 무사히 살아 돌아 왔구나.’하는 느낌을 가졌다. 몇몇의 여교우들은 울어서 눈언저리 부위가 부어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 소식은 산림과 직원들이 전해 주었던 것 같았다.

울릉도는 좁고 또 소식이 빠른 곳이다. 공소에 가서 있었던 일이 집에 돌아오기도 전에 익히 본당에 알려져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한번은 ‘평리’라는 공소에서 가을 판공을 치르게 되었는데, 어떤 40대 여교우가 고집을 부리며 아무리 달래고 야단을 쳐도 끝까지 모른다고만 우기고 찰고를 하지 않았다. 판공 때까지 이 부인 혼자서 신부의 말을 듣지 않고 모른다고만 일관하며 주모경도 외우지 않는 것이었다. 공소회장이 미리 귀띔을 해 주었기 때문에 이번만은 기어코 찰고를 받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동안 실랑이를 했다. 그래도 묵묵부답이었다. 그 후에는 싱글싱글 웃기까지 하면서 부아를 돋우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해보라면서 선창을 했는데도 따라 할 줄 모른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참다못해 대청마루에 있는 빗자루를 거꾸로 집어 들어 앉아 있는 여교우의 다리를 힘껏 내리쳤다. 그랬더니 “신부가 사람을 친다.”고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나는 내친김에 다섯 차례나 더 때렸다. 그때서야 자신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그 후 여러 가지 여론이 심심치 않게 돌았으나, 이듬해 봄 공소방문 때는 그 고집통이 부인이 12단을 잘 배워서 찰고를 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 때 그 부인을 때렸다는 소문이 본당에 전해져서 신자들끼리 옥신각신했다고 한다.

울릉도의 인구는 불과 2만 3천여 명뿐이었지만 얼마나 말들이 많은지 모른다. 특히나 불과 인구 2만 3천여 명밖에 되지 않는 곳에서 국회의원이 한 명 났으니 더 말 할 것도 없었다. 물론 정치 풍토도 말이 아니었다. 8.19선거 때 국회의원에 출마한 사람이 무려 11명이나 되었고, 최다 표를 얻었다고 해도 5,000표이며, 당선자와 낙선자와의 표 차이는 24표 정도였고, 최소득점자는 45표 차도 있었으니 이 얼마나 단결되지 않은 곳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일 것이다.

바닷가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비슷하겠지만 미신을 믿는 것이 심하고, 삶의 안정이 되지 않아서인지 남자들의 기질이 다혈질에 가깝다. 그런 반면 여자들은 비교적 성격이 온순하고 명랑하며 대체로 바다를 싫어한다. 그것은 바다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생겨난 두려움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이 마침내 미신을 믿게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