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를 점치기 어려운 박빙의 경기는 종목에 관계없이 시선을 뗄 수 없다. 이 치열한 경쟁의 곁에 서 있는 감독이나 코치의 긴장되고 흥분된 모습은 또 하나의 관전거리가 된다. 그들은 적절한 시점에 각 선수들의 움직임에 대하여 질책하거나 독려하면서 마른 입술을 연신 적시며 많은 지시를 쏟아낸다. 나는 변화무쌍한 경쟁의 현장에서 순간적으로 내려진 지시들이 승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까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종료시간이 임박하여 머리를 맞대고 결정한 작전이 성공할 확률은 어느 정도일까? 코트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변화들을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변화를 가정하여 내린 결단은 상대가 예측대로 움직여 줄 때에만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승부는 결국 다양한 변화에 대처하는 선수들 개개인의 능력에 의하여 좌우될 것이며 감독의 요란한 지시도 선수들이 자신의 기량을 펼쳐 보일 수 있게 하는 지극히 제한적인 하나의 충고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전통적인 교육사조에 익숙해 있다. 전통적인 교육에서는 절대적으로 가치 있는 지식을 중시하고 이 지식을 어떻게 전달해 주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이다. 따라서 교사는 지식의 전달자이며 자신이 먼저 축적해 둔 지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학생들을 앞에서 이끌며 일사분란하게 따라 오도록 끊임없이 재촉하는 역할에 몰두하게 된다. 학생들은 반복학습과 암기를 통하여 수동적으로 지식을 전달 받는 것이 학습의 주된 활동이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방식은 한사람의 시범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따라가는 ‘사범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범식’ 교육의 사조는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에는 적합했을지라도 사회가 다극화 되고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지식들이 쏟아지는 정보화 시대에는 그 의미가 점점 퇴조되어 가고 있다. 오늘날의 지식은 적절한 환경에서 교사의 안내 또는 도움을 받아 구성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교육의 정의와 과정도 변화되었다. 현대의 교육은 기존의 지식을 전수 받는 활동보다 새로운 지식을 구성하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완성된 지식을 전해 주는 것이 학습의 목적이 아니라 지식의 씨앗을 던져 주고, 그 내용을 확산시켜 스스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주된 활동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사나 부모의 역할은 더욱 섬세하고 고도의 전문성을 요한다고 볼 수 있다. 게임에서 감독과 코치의 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선수보다 예측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개인의 판단과 능력을 갖춘 선수가 승리를 안겨 줄 것이다. 스포츠에 비견될 수 없는 길고도 복잡한 삶의 현장에서 짐작될 수 없는 미래를 살아가야 할 내 아이들과 제자들에게 그들의 생각과 판단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데에 필요한 지식을 구성하는 능력과 경험을 쌓도록 도와주어야 할 때이다.
아들 라파엘이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의 일이었다. 하루는 국어시험지를 들고 흥분하고 있었다. ‘잠자리를 잡으려다 놓쳐버린 아이의 심정으로 적합한 말은?’ 대충 이런 내용의 질문에 ‘아깝다.’, ‘안타깝다.’, ‘불쌍하다.’, ‘미안하다.’ 등 제시된 단어 중에 하나를 고르는 문제였다. 라파엘은 오랜 고민 끝에 ‘불쌍하다’를 선택한 모양이다. 보기 좋게 틀렸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 죄 없는 엄마에게 흥분을 하며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자신이 틀린 이유에 동의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잡아서 구워 먹고 싶은 아이가 있었다면 ‘아깝다’가 정답일수 있고, 비록 잡히지는 않았지만 위협을 받아가며 살아가는 잠자리가 불쌍한 느낌을 갖는 것은 평소 라파엘의 성품으로 보아서는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었음을 알 수 있다. 힘없는 곤충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미안해야 하는 것도 오히려 대견스럽게 보아 주어야 할 것 같다. 객관적이고 편리한 평가를 위하여 이런 식의 선택을 강요하는 방식을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물론 극단적인 이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지식이란 ‘맞다.’ ‘틀리다.’로 판별되기에는 복잡하고도 다양한 것이다. 하지만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이러한 문항들로 결정된 순위에 뭇사람들이 모든 것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고 이야기한다. 교육이 변하고 평가가 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할 인간의 능력이 변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수직적인 서열의 구조가 뚜렷하고 상승욕구가 팽배한 가치관 속에서 내 자식부터 실천한다는 것은 많은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한다. 단편적인 지식을 많이 암기하고 그것을 재생하는 것을 평가의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것이 불합리하다는데 동의하면서도 우리는 정말 고집스럽게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이 현실이다.
직사각형의 정답카드, 다섯 개의 숫자를 나타내는 눈금은 의장대처럼 숨 막히게 도열하여 수성 싸인펜의 기록을 기다리고 있다.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긴 시험의 문항들에 대한 답변을 제한된 몇 개의 예시 중에 하나와 대응시켜야 하는 순간이다. 조금은 동의하지만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속임수와 같은 문제들로 기만당하고 있는 듯하여 마음이 상한다. 하지만 결단을 내려야 하고 틀린 것과 조금 틀린 것의 차이는 인정될 수 없다.
평가는 냉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긴 설명이 필요한 나의 의사를 나타내는 최후의 수단은 단지 수성 싸인펜으로 짧은 막대를 그리는 것이 모두이다. 떨리는 손으로 갈등의 종지부를 찍으려 하지만 나의 결정에 대한 후회와 망설임은 끝이 없다. 하지만 무심한 카드리더의 예민한 센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크에 묻어 있는 탄소 성분만을 추적하여 순식간에 수많은 아이들을 점수로 변환시켜버린다. 아이들의 체온은 사라지고 싸늘하게 식어 버린 숫자들만이 완강한 어깨로 늘어선다.
‘상위 10%만 인쇄할까요?’ 엔터 키를 치면 프린터기에서 밀려나오는 이름들에 관심과 찬사가 쏠린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이하여백’ ‘……….’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침묵에 빠지고 만다. 90%의 아이들을 묻어버리는 한마디, 자신의 이름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이 익명의 아이들은 그렇게 관심 밖으로 밀려나가고 마는 것이다. 상위 10%를 만들어 주기 위하여 통계의 분모가 되어 주는 한순간의 역할을 끝으로 눈길도 받지 못하는 그들을 우리는 감히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나에게 계속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큰 의미를 주는 나의 아들과 딸들의 이름을 그렇게 묻어버리는 ‘이하여백’, 그 침묵의 아우성에 가슴이 저리다. 하지만 스스로를 묻으면서 소리 없이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하여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하느님의 큰 사랑들이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익명의 아이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발견해 주는 것이 지금 교사인 나와 모든 부모들이 실천해야 할 어렵고도 깊은 사랑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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