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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읽는 대구순교자 20위 - ⑦ 최봉한
최봉한 프란치스코


김혜영(율리엣다)|포항 대잠성당, 동화구연가

“진강아, 우리 조선교회에 드디어 신부님이 오셨다는구나. 이렇게 기쁜 일이 또 어디 있겠니! 지금 서울에 주문모라는 중국인 신부님께서 오셨다고 하니 우리도 서둘러 서울로 가자꾸나.”

‘진강’이란 최봉한 프란치스코의 어릴 적 이름이에요. 최 프란치스코는 1783년 홍주 다래골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어려서 아버지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는데, 그의 집안은 천주교 믿음이 아주 강한 집안이었어요. 조선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이 바로 그의 집안이었지요.

어머니와 함께 입교한 후 그는 공주의 무성산에서 살았는데, 1794년 주문모 신부님이 서울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어머니는 그와 그의 누이를 데리고 서울로 옮겨가기로 한 거예요.

서울에서 이들은 주문모 신부님에게 성사를 받았어요. 그 후, 최 프란치스코는 주문모 신부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천주교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정약종을 따르며 믿음과 학식을 키워갈 수 있었어요. 또 그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천주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그 당시 교리 지식이 뛰어났던 황사영, 최필공, 김한빈 등과 어울리며 절친한 친구가 되었지요.

몇 해 후, 최봉한 프란치스코의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누이를 정약종의 집에 머물도록 부탁하고는 다시 충청도로 내려갔어요. 그때까지 그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어요.
“이보게, 봉한이. 자네 나이가 이젠 적지 않으니 더 늦기 전에 장가를 가야 하지 않겠는가?” 친척들은 결혼이 늦은 그를 걱정하며 말했어요.

“글쎄요. 결혼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가족들에게 더 마음이 기울게 될 터인데, 사실 저는 지금 이대로 천주님만 믿고 바라면서 혼자 살고 싶습니다.”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동정생활의 고귀함을 잘 알고 있었고, 평생 동정으로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결혼에 대해 이제까지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물론 혼자 살면서 믿음을 지켜가는 일도 의미가 있겠지만, 신앙심 깊은 배우자를 만나 서로 도와가며 믿음의 가정을 만드는 것 또한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마침 내가 자네와 딱 어울릴 참한 처녀를 알고 있으니 한번 만나나 보게나. 서석봉 안드레아의 딸인데, 아주 믿음이 깊은 집안의 자녀라네.”

이렇게 해서 최 프란치스코는 주위 친척들의 권유로 서석봉 안드레아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1800년, 천주교에 대해 너그럽던 정조 임금이 죽고 뒤이어 벽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이들은 천주교인들을 아주 싫어했어요. 그래서 마침내 1801년 천주교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신유박해였어요. 이 박해로 주문모 신부님을 비롯해서 정약종, 황사영, 최필공, 김한빈 등이 박해의 칼날에 순교하였지요. 신유박해의 칼바람은 서울은 물론이고 충청도 지방에까지 몰아쳐서 최 프란치스코는 처가 식구들과 함께 박해를 피해 피난을 가야만 했어요. 이때 최 프란치스코는 위험을 무릅쓰고 주문모 신부님 등이 지녔던 천주교 성물들을 수습하였어요.

청송 노래산 골짜기에 정착한 그는 이곳에 새로운 신자촌을 만들었어요. 이들은 비록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일하고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어요. 그러나 이러한 평화로운 생활은 배교자 전지수의 밀고로 십여 년 만에 끝이 나고 말았지요.

1815년 부활 대축일 아침,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교우들은 모두 체포당하고 말았어요. 최 프란치스코는 청송아문으로 끌려가면서 교우들에게 말했어요.

“관헌이 문초를 하면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리시오.”

이로 인해 최 프란치스코는 ‘옥사의 괴수’라는 죄목까지 더해져서 다른 교우들보다 한층 더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었어요. 청송아문에서 다시 경상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몇 번이나 기절할 만큼 혹독한 매질을 당했지요. 그러나 그는 겸손함과 조금도 흔들림 없는 굳은 의지로 꿋꿋하게 믿음을 지켰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함께 체포되어 용감히 믿음을 지켜오던 그의 장모 구성열 발바라가 삼모장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받고 감옥으로 돌아왔어요. 최 프란치스코는 순간 장모가 혹독한 형벌을 못 이겨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어요.

“장모님, 하느님을 위하여 함께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결코 안 되겠습니다.”

최 프란치스코는 장모에게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기를 간곡하게 권유했고, 사위의 위로와 격려의 말에 구 발바라는 다시 용기를 얻어 믿음을 지킬 수 있었어요. 이렇게 그는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도 힘든 상황에서 오히려 다른 교우들을 걱정하며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어요.

1815년 5월,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무자비한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인해 결국 감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그의 나이 서른을 갓 넘긴 때였지요. 최 프란치스코는 신유박해 이후 기호지방에서 무너져 내린 교회의 씨앗을 경상도 지역에 와서 뿌리고 가꾸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어요. 이는 한국 천주교회의 맥을 이어주는 크나큰 업적이지요. 비록 짧은 생을 살다 간 그였지만, 그의 열정적인 믿음과 그가 보여준 신앙의 모범은 그를 가장 훌륭한 신앙의 증거자 중의 한 사람이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