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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 이상열 시인
소박한 동행의 초대장, 두무치 편지


취재|김명숙(사비나)·본지 편집실장

오늘도 엎드린 채 입에는 붓을 물고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벌써 20년도 더 되었다. 가슴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전신마비 장애시인이자 구족화가인 이상열 씨. 초여름이 시작될 즈음, 이상열(바울로, 포항 장성성당) 시인을 만나기 위해 대구-포항 고속도로를 타고 장성성당 근처의 한 아파트로 찾아갔다.

작업실 겸 주거공간인 아파트 현관에 발을 들여놓자 직접 그렸다는 마더 데레사의 인물화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거실 벽면으로는 시인의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는다는 시인은 언제나 엎드린 자세로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쓴다. 사고가 안겨준 후유증이다.

1982년 추락사고로 전신마비의 장애를 갖게 된 이상열 시인. 누군가 옆에서 돌봐 주지 않으면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가족과의 결별 그리고 혼자서 살아내야 하는 치열한 홀로서기는 고통 그 이상의 것으로 와 닿았다. 국어과 교사로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그에게 닥쳐 온 엄청난 불행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더 이상의 희망이라고는 눈앞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그에게 생명의 끈이 되어 제2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운 것은 가톨릭에의 입문과 바로 시(詩)였다.

1986년 베난시오 수녀의 전교로 교리를 배워, 1989년 덕수성당 조환길(타대오) 신부로부터 ‘바울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그는 시인이자 구족화가로 거듭났다. 그리고 지금, 그의 곁에는 언제나 버팀목이 되어주는 두무치 패랭이회 회원들이 있다.

‘두무치 패랭이회(회장:김효섭 베드로, 지도:박성대 요한 신부)’는 2001년 당시 죽도성당의 주임  박성대 신부의 제의로 이루어진 이상열 시인의 후원 단체. 처음에는 50여 명의 회원으로 출발하였는데 어느새 90명으로 회원 수가 늘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끼리 사랑을 나누는 모임의 성격을 가진 두무치 패랭이회는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이들 회원들은 박성대 신부의 주례로 매월 한 차례의 미사를 봉헌하고 시낭송 모임도 따로 진행하고 있는데, 두무치 패랭이회의 ‘두무치’는 시인이 살던 포항 인근 바닷가 동네인 두호동의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란다.

두무치 패랭이회 회원들에게는 매월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요즘처럼 요금별납으로 처리되어 우표 구경하기 힘든 때에 직접 우표를 붙여 사람향기 묻어나는 시인의 편지는 8년째 지속되고 있다. 1998년 포항 대백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가진 후, 이 시인이 지인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띄운 것이 두무치 편지의 시초가 되었고, 지금까지 매월 한 통씩 거르지 않고 보내어 올해 6월로 100호를 맞았다. 지난 2005년 가을에는 그간의 편지들을 엮어 《두무치 편지》라는 이름의 산문집을 발간하여 회원들과 조촐한 출판기념회도 가진 바 있다.

사고의 아픔을 시로 승화시켜 창작에 몰두하면서 1992년 솟대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한 이상열 시인은 월간 조선문학 신인상 수상(1994년)에 이어, 1999년에는 솟대문학생 본상을 수상하였다. 아울러 1997년 세계 구족화가협회 회원 등록 후 여러 차례의 전시회를 통하여 대한민국 장애인 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수상(2000년)하는 등 시인이자 화가로 꾸준히 활동해오고 있다.

전신마비의 장애를 딛고 자신의 홈페이지(www.dumuchi.com)를 통해서도 시와 산문 그리고 그림을 소개하고 있는 이상열 시인. “내 생애 가장 힘겨울 때 하느님을 알게 되어 하느님 사랑 안에서 참으로 소중한 은인들을 만나 새 삶을 시작했으니 이 모든 게 주님의 은총 덕분.”이라며 “영적 스승이시고 은인이신 박성대(내당성당 주임) 신부님과 조환길(매일신문사 사장)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두무치 패랭이회 회원들에게도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라고 전한다.

그동안 시집과 산문집 등 다섯 권의 책을 펴낸 시인에게 특별히 애착이 가는 시가 무엇일까, 궁금하여 물으니 이상열 시인은 첫 시집의 제목과도 같은 시 <우리가 살다 힘들 때면>이라고 들려준다. 시인에게는 가릴 것 없이 모든 시가 다 소중할 텐데, 특별히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질곡에서 괴로웠거나 힘겨웠을 때 쓰인 시여서 그러하겠다.

“하느님께서 저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 매일매일 깨닫고, 또 저를 지켜봐주는 은인들 덕분에 힘을 얻어 살아간다.”는 이상열 시인. 그는 “2008년이면 두무치 편지를 보낸 지 꼭 10주년이 되는 해.”라며 “그때쯤 개인전을 열 계획도 갖고 있다.”고 덧붙인다.

이제 자신의 삶에서 시(詩)와 그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또 하나의 분신이자 자신을 살게 하는 힘이 될 터. 힘겨운 삶의 여정에서도 식지 않을 열정을 작품으로 쏟아내며 창작에 매진하는 이상열 시인을 만나고 오는 길. 패랭이꽃 활짝 핀 유월에 부치는 시인의 ‘두무치 편지’ 구절구절들이 여운으로 자리한다.

“흰 찔레, 이팝나무꽃, 아카시아가 한창입니다. 곧 여름 참 빠릅니다.…두무치 편지는 동행을 청하는 소박한 초대장이며, 간이역에 내려 잠시 숨고르기를 하며 쉬어가기를 바라는 사랑의 엽서입니다.…하느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소박한 동행의 초대장을 보내드릴까 합니다.…” - 이상열 시인의 ‘두무치 편지’ 100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