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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길준 신부의 울릉도 사목일기
아름다운 울릉도(4)


고(故) 이길준 신부

“신부가 점쟁이보다 더 잘 안다.”

1961년 봄이라고 생각된다. 어느 날 교우 할머니가 한 할머니를 성당에 데리고 와서 나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리고는 물에 빠져 죽은 그 할머니 아들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올려 달라는 것이었다. 조금 이상해서 그 아들이 언제 물에 빠져 죽었냐고 물었더니, 그 죽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10일 전에 동네 사람들과 함께 명태잡이 배를 타고 나갔단다. 명태잡이를 가지 않겠다고 하는 아들을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선원들이 끌다시피 해서 저녁에 고기잡이를 나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늦게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이 심해지면서 태풍으로 변했고, 결국은 출항했던 배들은 모두 돌아왔는데 그 할머니 아들이 타고 있던 배만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이미 소식이 끊긴 지 10일이 지나고 있었고, 그 배를 타고 나갔던 선원들의 가족들은 모두 근심이 되어 참다못해 점을 쳤는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물귀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그 점쟁이를 믿지 못해 세 명의 점쟁이에게 다시 점을 쳤는데, 모두 앞의 점쟁이가 말한 대로 똑같은 점괘가 나왔다고 했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죽은 혼령을 위하여 굿을 하고 더러는 불당에 혼백을 모셨다고 했다. 마침 그 할머니는 교우 할머니와는 바로 앞뒷집 이웃해서 살고 있는데, 아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는 그 친구 할머니를 위로할 겸 성당의 신부님께 부탁해서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받으면 좋다고 달래어 성당에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나는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내쫓을 수도 없고 또 신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그 교우 할머니를 무조건 나무랄 수도 없어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그 배가 10일 동안 소식이 없다고, 아들이 꼭 죽었다고 단정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또 점쟁이들이 죽었다고 했는데 점쟁이들의 말을 뭘 보고 믿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의 아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생미사를 드리겠습니다. 만일 죽었다면 연미사를 대신할 수 있으니까요.”라고 했더니 그만 그 할머니는 내가 생미사를 지내겠다고 했다며 동네에 가서 소문을 퍼뜨렸다.

그 날 저녁미사에 그 할머니의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미사에 참례했다. 나는 전혀 몰랐었는데 두 할머니와 가족들이 자기 아들이 살아 있다고 신부가 말했다면서 온 동네에 퍼뜨렸다는 것이다. 이 일로 동네에서는 시비가 붙었다. 점쟁이 말을 곧이듣고 제사를 지낸 사람들과 할머니의 말을 듣고 살아있다고 믿는 사람들끼리 혼백을 모셔야 하느냐, 아니면 ‘신부’라는 점쟁이를 믿고 기다려야 하느냐, 옥신각신 야단이었다. 이 일은 동네에 숱한 분쟁을 일으켰다고 한다.

교우들 중 몇몇은 신부님이 무엇을 안다고 죽은 사람을 살아있다고 허튼 소리를 했느냐며 따지러 온다고도 했다. 어떤 면으로는 영영 죽고 돌아오지 않으면 큰 화가 교회에 닥쳐올 위험이 있었다. 그야말로 위로의 말을 한 것이 엉뚱한 결과를 빚고 말 뻔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소식이 끊긴 지 12일이 지난 후에 일본 북해도 당국에서 한국 해양국으로 구조된 사람의 명단과 배의 이름을 전문으로 알려 왔다. 말하자면 그 배에 탄 사람 12명과 배가 모두 북해도 연안에서 구조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전문을 받은 울릉도 도민들의 놀라움은 과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 성당에서도 난리가 났다. 신부가 어찌 그렇게 용하게도 잘 아느냐고….

그 다음 주일부터 이 선원들의 가족 70여 명이 몰려왔고, 이제 모두가 지금부터 성당에 열심히 다니겠다고 했다. 그야말로 골칫거리가 하나 더 생겨났다. 말하자면 이런 순 미신투성이의 뱃사람 가족을 어떻게 해야 올바른 정신을 가지도록 해서 신자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기쁜 근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들 모두 다 구하지는 못했으나, 그 중 10여 명은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런 미신으로 가득한 섬에서 전교를 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미신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이야기 해야겠다.

라파엘호의 첫 출항(1)
‘라파엘호!’ 울릉도의 도로는 구루마(리어카) 바퀴 하나도 굴러다닐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유인즉 자전거 한 대도 없으니까.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걸어 다녀야 했다. 공소가 섬 안에 15개 곳에 있어서 섬 일주를 하려면 무려 120리가 되었다. 그 중 북면공소는 50리, 가까운 곳이 30리, 서면 쪽은 먼 곳이 50리, 가까운 곳은 20리였다. 이 50리나 되는 곳에 가려면 섬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고기잡이 발동선을 이용한다.

하는 수 없이 주교님께 수차례 말씀드려 배를 한 척 마련했다. 그 배의 가격은 육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버스와 맞먹는다. 그리고 이것은 성당을 짓는 것만큼 큰일이었다. 배 한 척에 선장, 기관장, 갑판장까지 이렇게 3명이 필요한데 이들을 월급을 주고 고용해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며, 이 배로 명태잡이를 나가면 7명 내지 9명을 고용해야 하고 오징어잡이를 할 때는 13명이 필요했다.

좋은 배는 도민들의 생활수단과 직결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 배는 교통수단에 유일한 것이었고, 사목활동에 정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이 배를 갖게 되자, 신자들이나 나에게 있어 큰 기쁨이었다. 선장과 기관장, 갑판장은 교우들의 몫이었고, 맨 처음 오징어잡이를 나갈 때 전 교우남자들이 탈 정도였으니 얼마나 기뻤는지! 배가 축항을 떠나 고기 잡으러 간다는 것은 내 마음에 얼마나 벅찬 흥분을 주었는지 모른다. 고기가 만선이 되어 착 가라앉아 들어온다면 그야말로 환성을 지르게 될 것이다.

물론 배를 운행한다는 기쁨이 큰 만큼 그 고생도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점도 많이 따랐다. 배를 처음 운행하는 데다 경험조차 없으니 그야말로 투쟁이었다. 얼마나 많은 시비를 해야 하고 선원들을 이해 시켜가면서 일을 시켜야 하는지.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심하면 뒤주선도 해야 하고 잡아 온 고기를 건조해야 하고, 또 팔아야 하는 어려움 등 복잡하기 이를 데 없으나 젊으니까 모두 기쁘게 잘 해냈다. 그런데 처음으로 배를 구입하여 진수(進水, 새로 만든 배를 처음으로 물에 띄움)를 할 때의 일이다. 그 배 진수식 때 선원들이 해신제(海神祭)를 지내자고 하는 것이었다. 울릉도에서는 누구나 배를 새로 사든지, 배를 모으든지, 첫 진수를 할 때는 ‘태하’라고 하는 곳에 가서 울릉도 수호신께 제사를 올리고 바다의 용왕님께 제사를 지내는, 말하자면 해신제를 거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배가 안전운행이 되고 바다의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 그러나 내가 어떻게 그 해신제를 지내도록 허락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해신제보다 더 좋은 하느님께 제를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하여 배 위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선원들과 그들의 가족들, 신자들이 모두 모여 술과 떡을 실컷 먹으며 배 진수식 잔치를 했다. 이를테면 마을 잔치를 한 셈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 배가 그때 울릉도에서 첫째, 둘째가는 좋은 배였으며, 교회기와 교황기를 달고 섬을 일주했다. 그것이 1961년 5월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7월 들어서 오징어잡이가 시작되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다른 배들은 고기를 많이 잡아오는데 우리 라파엘호는 통 고기를 잡아오지 못했다. 그러자 선원들은 해신제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해신이 노하여 고기를 못 잡게 방해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선원들이 그렇게 말을 해도 고기가 좀 잡히면 그 말이 쏙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여러 날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선원들은 나를 원망하며 해신제를 지내야 한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나는 신부로서 그런 미신 같은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제 곧 고기가 많이 잡힐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더 기다려 보자고 얘기했다. 그러나 나의 추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한 달 내내 라파엘호만 공치고 말았으니 선원들의 원성은 이제 격분으로 변해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은 고기(오징어)도 많이 잡아오는데 고기 한 마리 잡아오질 못했으니 선원들의 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교우인 선장도 때가 되면 고기가 잡히겠지, 하며 꼭 해신제를 지내야 할 이유는 없다면서 배에서 미사를 지냈으니 걱정 할 것 없다고 생각했는지 선원들을 만류하고 타일렀으나, 이제는 선장 자신도 흔들리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한 달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게 되자, 선장으로서의 책임도 크고 선원들의 위협을 견디다 못한 선장은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아무래도 울릉도의 풍습이 그러하고, 또 선원들의 생계가 긴박하니 신부님이 모른 척하고 계시면 제가 서둘러서 해신제를 지내겠습니다. 그래야만 선원들의 분노가 멎고 안정된 마음으로 고기를 잡으러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선원은 배를 타고 가기는 하나 숫제 밤새도록 낚싯대 한번 물에 던져 보지도 않습니다. 낚싯대를 물에 담그지도 않고 어떻게 고기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고기잡이에도 사기문제가 크게 좌우하는 법이니, 사기를 북돋워주어야 고기를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하며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몹시 입장이 난처해졌지만, 그렇다고 다시 무엇을 고려해 볼 문제도 못되고 해서 “방법은 없습니다. 배 타는 사람들 모두 내려서 다른 배를 타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또 더 나아가서 배를 묶어두는 한이 있더라도 미신은 지킬 수 없습니다.”하고 단언해 버렸다. 선장은 대단히 실망해서 돌아갔다. 그 후 대부분의 선원들은 다른 배로 옮겨 갔고, 다른 배로 옮겨 가려고 해도 더 이상 자리가 없어서 못 간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에 고기잡이 일꾼이 아닌 교우 몇 사람을 그 빈 자리에 태우고 며칠 더 고기잡이를 떠났지만 여전히 허탕만 치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선원도 선원이지만, 선주인 나는 이만저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배를 움직이는 기름, 전기 비용, 선원들의 생활비 등 잔뜩 빚을 지고 있어 대단히 곤궁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는 선장, 기관장, 갑판장 외 몇 명의 교우 선원이 찾아와서 살려 달라고 졸라댔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당신들에게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해신제를 지내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그들 생활에 직결되는 문제인데다, 특히 고정 선원 세 명은 이미 어린 아이들까지 굶주려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나와 타협이 되질 않자, 선장은 나에게 자기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나가 보자고 제안을 하는 것이다. “내가 무슨 신이기에 같이 가면 고기가 잡히겠느냐?”고 했더니, 선장은 “그래도 신부님께서 같이 고기를 잡으러 나가면 우리 뱃사람들의 사정을 좀 알지 않겠습니까?”라며 기어이 같이 나가보자는 것이다.

사실 처음엔 그 말을 듣고 좀 이상한 생각을 했었다. 혹시 격분한 선원들이 나를 바다에 밀어 넣고 고생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이 교우들인데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승낙했다. -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