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특별기고 - 포항 장기, 다산 정약용 선생 유배지를 찾아서
다산(茶山) 찾아가기


정영목(아킬로)|정인한의원 원장, 한의학박사

앞으로 3회에 걸쳐 소개할 <다산 찾아가기>는 1. 다산 다가가기 2.다산 상세보기 3.다산 숨결찾기 4.다산 음미하기 5.다산 사랑하기 순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발자취를 통해 그의 신앙과 삶을 다시 한번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 편집자 주(註)

1. 다산 다가가기
우연히 접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자료집에서 놀라운 발견을 하였다. 평소 흠모해오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1차 유배지가 포항 장기이며 그곳에서 7개월간 생활하셨다는 것이다. 흔히 다산 유배지라고 하면 전라도 강진, 다산초당 이런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살고 있는 이 경상도 지역에 그 위대한 다산이 숨쉬고 생활하던 발자취가 있었다니. 비록 뒤늦게 알게 된 일일지라도 이것은 굉장히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교과서 밖에서의 다산 인연은 1998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구지역 가톨릭 한의사신우회를 발족하며 성인(聖人) 중의 한분을 신앙적 지도자로 모시게 되었는데, 우리는 가톨릭 신자이며 한의서를 저술하시고 뛰어난 한의술을 행하신 다산 정약용 선생을 떠 올렸으나 아쉽게도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관계로, 대신 다산의 조카이며 초기 한국천주교 정립에 큰 업적을 남긴 정하상(바오로)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다산의 생가가 있는 남양주나 강진의 다산초당을 찾기에는 남 줄 수 없는 게으름 때문에 언제까지 벼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던 줄로만 알았던 다산이 지척에 있었다니…. 사방으로 수소문하며 다산에 대한 정보와 자료 찾기에 나섰다. 그러다보니 다산의 위대함 만큼이나 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산을 공부하고 다산을 사랑하고 다산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놀랐다.

막연히 다산을 동경하고 있던 나에게 길을 열어주신 분은 영남교회사연구소 부소장이며 천주교 대구 관덕정후원회장을 역임한 마백락(클레멘스) 선생님이시다. 마 회장님은 다산과 장기에 관한 질문에 많은 정보와 자료를 내어 주셨고 또 기꺼이 동행해 주셨다.

2005년 11월 13일 일요일 12시, 포항 장기답사를 위하여 마회장님과의 만남 장소인 칠곡 신동재 정상의 숲 속에 있는 애생원으로 찾아갔다. 이 곳은 한때 소록도병원과 함께 국립나병원이 있었던 곳으로 소록도를 제외하고선 육지에서 가장 큰 한센씨병(나환우) 정착촌이었으며 현재도 130여 가구가 모여 양계를 생업으로 하는 마을이다.

신동성당 연호공소라는 작은 교회 종탑 아래로 차곡차곡 쌓여있는 은행나뭇잎을 밟으며 마을 특유의 계분(鷄糞)냄새 속으로 젖어 들어가니, 대학시절 왜관·성주의 한센씨병 정착촌과 소록도에서 활동하던 추억이 되살아나며 온갖 감회가 교차되었다. 커피 한 잔 하러 마을회관에 들렀는데, 마을 주민의 약 20%인 천주교 신자분들이 마침 주일 공소예절을 끝내고 공동으로 점심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마회장님은 1961년도부터 45년째인 현재까지 매 주일마다 나와서 주민들에게 공소예절과 레지오회합을 지도하고 계신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잠시 어울리는 동안에 커피 한 잔은 어느새 밥 한 끼로 바뀌어, 이 마을 특식인 계란말이와 냉이 된장국으로 함께 식사와 정담을 나누었다. 이윽고 커피를 마시려는 순간, 어느 분이 무릎 관절염에 관한 문의를 하였고, 자연스럽게 즉석 한방 무료진료가 펼쳐졌다. 결국 커피 한 잔에 2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새로 개통된 대구-포항 고속도로를 단숨에 달려 장기로 향하였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가노라니, 지금부터 204년 전에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강제 유배되어 가던 다산의 지친 모습이 떠오르는 듯하여 사뭇 숙연해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고서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을 만나듯, 고해성사를 통한 회개와 통회를 거친 후 거룩하신 하느님을 뵈올 수 있듯, 백성을 긍휼히 여기던 위대한 다산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애생원의 보시(布施) 정도는 필요했으리라고.

2. 다산 상세보기
다산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포항으로 떠나기 전, 거쳐야 할 과정은 또 있었다. 다산을 알려면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산은 조선 영조 38년(1762) 현재의 경기도 광주 초부면 마현리(현재 남양주)에서 태어났다. 그 해는 바로 아버지인 영조임금이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임오화변’이 일어난 해였다. 우리 역사상 전대미문의 가장 참혹한 일로 기록되고 있는 이 사건은 영조측 노론과 사도세자측 소론과의 누적된 당파싸움으로 인해 파생된 비극이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당파싸움은 더욱 격화되어 사도세자의 뒤주사건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벽파와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시파의 목숨을 건 권력다툼으로 전개되었다. 이처럼 정치적 정세가 민감하고 뒤숭숭한 시기에 다산의 생애가 시작되었다.

다산의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고산 윤선도의 6대손이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 자는 미용, 송보이고, 호는 사암·열수·다산·자하도인·문암일인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특출하여 10세 때 이미 <삼미집>이라는 시집을 만들기도 했다. 15세 때는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남인 시파의 대학자이며 실학의 선구자인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접하게 되고 그 학풍에 매료되어 심취하게 된다. 그 해에 결혼하고 18세에 성균관 승보시에 뽑혔으며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23  세에 정조임금에게 「중용강의」를 바쳐 감탄케 하고, 2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시작하였다. 탁월한 천재성으로 정조 임금의 각별한 총애 속에 고속 승진하는 한편, 또 정적들의 질시와 모함으로 좌천되는 등 여러 번의 승강부침을 거쳐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관직에 이르렀다.

다산보다 10년 연장인 정조는 당파싸움의 폐해로 희생된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으며, 자연 그와 관련되었던 보수 노론세력을 경계하였다. 반면, 정조의 심정을 헤아리며 조선후기의 피폐한 정치·경제·민생 등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개선하려는 다산과 같은 개혁적이며 실학적인 시파 학자들은 가까이 등용하였다. 이는 다시 노론 벽파측을 자극하게 되고 급기야는 서학과 천주교에 호의적인 남인 시파를 아예 배척하려는 화를 키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산과 그 가계가 천주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정적들에게 는 커다란 호재가 되는 셈이었다.

여기서 잠시 천주교의 전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후기 천주교 전래의 첫 단계는 중국 유학자들에 의한 서학의 입문과 천주교 교리의 학문적 연구에서 시작된다. 서학서란 서양의 발달된 과학기술 문명과 천주교 교리를 한자로 번역하거나 쓴 책들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천주실의>, <교우론>, <칠극> 등이다. 조선시대 정치이념과 사회적 규범의 근원은 주자학적 유교사상이었다. 그러나 주자학의 공리공담(公理空談)에 대한 회의와 폐해는 특히 임진왜란의 시련을 겪고 난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지도이념과 민족 사상운동을 요청하였다. 이런 때에 서학서를 통해 접한 실용적인 서구의 신학문은 당시 선각적 선비들에게 깊은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러나 번역된 서학서가 서양의 과학문물과 천주교 교리를 동시에 전하여, 이를 수용하던 서학자들은 종교와 과학을 전체로 합하여 파악하려는 오도된 서학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훗날 천주교를 이단시하여 배척할 때 서양의 과학까지 배척하여 결국 근대화를 늦추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서학에 대한 선각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바깥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자성을 갖게 하고, 자아에 대한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실학운동에도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 뒤로 이벽·이승훈·정약전과 정약용 형제,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 등에 의하여 비로소 천주교의 수용이 시작되었다. 문헌상 최초의 천주교 신봉자는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다. 그리고 성호 이익의 제자로 최초의 신앙실천 수도자는 봉화의 홍유한이었고, 그 뒤를 이어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의 회원인 이벽과 권철신 형제 그리고 정약용 형제 등 일련의 학자들이었다.
종교적 진리에 목말라 하던 광암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이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최초로 세례를 받고 1784년 귀국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벽이 주도하는 정기집회를 명례방 김범우의 집(현 명동성당터)에서 갖게 되었다. 이때가 1784년으로 한국 복음선교의 기점이 되며,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어 세계 선교사상 유래가 없는 자발적 자주성을 갖는 긍지를 지니게 되었다. 이는 1984년 5월에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순교복자 103위 시성식을 거행함으로써, 한꺼번에 103위의 한국성인(韓國聖人)이 탄생하게 되는 경이로운 일의 바탕이 되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중요한 인물들은 거의 다 다산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처음으로 도입한 이승훈은 다산의 큰매부였고, 광암 이벽은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처남이었고, 조선의 박해상황을 청나라에 알려 지원을 요청하려던 황사영은 정약현의 사위였다.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신지도·흑산도로 유배되어 생애를 마친 정약전은 둘째 형이었으며, 신유박해에 의연히 신앙과 목숨을 맞바꾸며 순교한 정약종은 셋째 형이었다.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과 부인 성인 유 세실리아, 아들 성인 정하상은 그의 누이 성인 정 엘리사벳과 함께 신유박해 때에 모두 순교하였다. 또 제사와 위패를 폐지한 ‘진산사건’을 일으켜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를 자극한 윤지충은 다산의 외사촌이었다.

이승훈으로부터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다산은 정조임금이 총애하는 개혁 실학자인데다,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반전을 노리는 보수파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역공의 빌미가 되었다. 다산의 나이 39세때인 1800년에 이르러 정적들의 횡포가 드세어지고 천주교와 관련된 무고가 점차 많아지자, 시세를 읽고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정조는 다산을 놓칠 수가 없어 안부를 알아보곤 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 28일 정조가 갑자기 별세하자, 다산을 비롯한 개혁적 학자들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위태해지게 된다.

정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순조는 11세의 나이로 너무 어려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정순왕후는 정조의 개혁세력에 대항하는 보수파인 벽파의 후견인이었던 지라 정세를 뒤집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정조 사후 즉시 정권을 접수하고 벽파관료들을 전진배치 하였으며, 남인과 시파에 관련된 인물들을 제거할 명분을 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인 1801년 정월에 ‘윤지눌 책롱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정약용의 형 정약종이 정조 사후 정세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천주교 관련물건들을 다른 곳으로 숨기려다 발각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참혹한 피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대적인 천주교신자 체포가 시작되었고 결국 이승훈·정약종·최필공·홍교만·최창현·이존창 등 300여 명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다산도 2월 9일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투옥되었으나,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탄원으로 직접 연관이 없음이 밝혀져 죽음만은 면하고 투옥 19일만에 풀려나 형 정약전과 함께 유배되었다. 그는 요즈음 벼슬로 대통령 수석비서관에서 사형 직전의 죄수로 전락하여 조선 하늘 끝자락의 바닷가 마을인 ‘장기’로 유배를 떠나오게 된 것이었다. -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