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8월 6일) 마르 9,2-10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런데 세 명의 제자들은 산 위에서 예상치 못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산 위에서의 체험을 둘러싸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에서 보듯, 베드로는 산 위에서의 거룩한 체험을 보고 초막 셋을 지어 거기 그대로 머물고 싶다고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산 밑으로 내려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지 않고 그냥 이대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유혹이자 제자들의 한계이며, 오늘날 우리의 유혹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 산 위의 거룩한 체험은 단순히 산 위에서의 영원히 머물러 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거룩한 체험의 자리이자, 동시에 그것은 이제 결단에 앞서 고뇌하는 자리였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에게 있어서 산 위의 거룩한 체험은 산 아래의 현실을 직시하기 위한 자리였고 나아가 예수님은 산 아래의 삶을 아버지의 뜻대로 충실히 살았기에 산 위의 체험을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하느님을 체험한 사건은 바로 우리 또한 산 위의 거룩한 체험을 하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즉 기도라는 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희생이라는 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복음이라는 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라는 산에 올라갈 때 우리 또한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 희생, 복음, 예수님의 산을 오르는 시간이 되면 어떨까요? 내가 이 산을 오르면서 힘들고 지치더라도 예수님이 항상 동행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연중 제19주일(8월 13일) 요한 6,41-51 사 람은 살기 위해서 밥을 먹습니다. 사람은 밥을 먹기 때문에 생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즉 이 밥은 몸의 생명을 가꾸고 이어주는 밥입니다. 그런데 입으로 먹는 밥이 아닌 다른 밥이 있습니다. 이는 마음으로, 가슴으로 먹는 밥입니다. 이 밥은 사랑, 믿음, 자유, 나눔, 섬김, 화해, 평화, 일치입니다.
밥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가슴으로 먹어야만 밥의 소중함을 압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입으로 먹는 밥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서로 많이 먹겠다고 싸웁니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난리입니다. 생명의 밥을 놓고 싸우다가 서로 멱살을 잡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집니다.
밥은 결코 죽음을 주지 않습니다.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밥 때문에 사람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들어섭니다. 자기 탓 없이 생명의 밥이 죽음의 밥이 되어버립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않을 때,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일 따름입니다. 입으로 먹는 밥 때문에 마음으로 먹는 밥을 잊어버린 사람은 사람답지 않습니다. 겉은 사람이지만 이미 속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생명의 빵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으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으로, 입으로 먹어야 하는 밥의 노예가 되어 사람답기를 포기한 사람들을 깨우시려고, 마음으로, 가슴으로 먹어야 하는 밥의 소중함을 일깨우시고, 그것을 주시려고 오셨음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입으로만 먹는 밥만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음으로, 가슴으로 먹는 밥을 생각합니까? 이번 주간 나는 어느 쪽에 치중하면서 사는가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연중 제20주일(8월 20일)요한 6,51-58 오 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며, 당신의 피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일반적인 양식이나 음료가 아니라 ‘참된’ 양식이며 음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참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참되다는 것’, 성체와 성혈이 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랑’ 자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지 못하면 온전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주지 못하고,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마치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건 없는 완전한 사람이 성체와 성혈 안에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체와 성혈은 사랑 그 자체라고 해야 더욱 맞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매일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바로 사랑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우리를 사랑 덩어리로 바꾸어 줍니다. 즉 이 사랑은 곧 우리의 참된 힘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군가를 딛고 일어서려 하고, 남들을 제물 삼아 위로 오르려하는 이 세상 한가운데 살아가면서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발판이 되어주고 제물이 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체로서 우리에게 먹힘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나누어주시고, 우리 또한 당신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먹히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번 한 주간을 보내면서 주님을 먹고 마신 우리가 예수님의 바람대로 다른 누군가에게 먹을 것으로 또 마실 것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삶을 살면 어떨까요?
연중 제21주일(8월 27일) 요한 6,60-69 오 늘 복음에서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투덜거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불평을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하느님을 공경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었겠습니까? 또는 부모에게 효도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었겠습니까? 아니면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쁜 행동을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을 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모두 요약하면 ‘사랑’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불평을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목격하였고 또 주옥같은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실천하기 어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수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혹시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이 또한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랑, 좋지만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 되나요?’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실천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오는 영원한 생명을 앞에 두고 나의 이익만을 먼저 생각하면서 그 소중한 것을 차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주님과 타협하고 더 나아가 못난 자신을 탓하기 보다는 주님을 탓하면서 주님께 등 돌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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