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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허광철 신부

7월의 말씀 묵상을 시작하며
“믿는 이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Wer glaubt, wird nie allein)” 9월 교황님의 방문을 준비하는 독일 교회의 모토이다.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자.”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휴가를 계획하는 7월! 일상에서든, 일터에서든, 휴가지에서든 어디에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는 포도나무가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지는 결코 나무와 떨어져서 혼자가 될 수 없다. 그렇듯 우리는 7월의 복음들에서 특별히 우리의 ‘믿음’과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 대해 더 잘 묵상해 볼 수 있다.
“믿는 이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오 주님, 생명을 창조하는 당신의 힘으로 저희와 함께 하소서. 사랑은 당신의 힘! 시간과 영원 속에 언제나 저희와 함께 머무르소서!”(교황님 방문 준비 주제가 중에서)

 

 


7월 2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 : 마태 10, 17-22
마태 10장 전체는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뽑으시고 파견하시며 하시는 말씀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10장 말미의 이 말씀이 ‘이리 떼 가운데서’박해를 받게 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오늘의 복음을 감싸고 있다.

제자들은 어떤 모양의 박해들을  받게 되는가? 복음의 표현에 의하면, ‘넘겨지고’ ‘매질 당하며’ ‘미움을 받고’ 나아가 ‘죽음’에도 이르는 박해를 받게 된다. 박해의 원인은 한 가지, ‘예수님 때문에’이다. 오늘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는 김대건 성인과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러한 박해를 받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러한 직접적인 박해는 어디에선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박해에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라고’ 주문하신다.

소위 믿음이 있다는, 자신의 믿음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낫다는(낫다고 착각하는) 이들에게서 자신은 박해를 받고 있다고 종종 듣는다. 누군가의 적극적 반대에 부딪친 교회의 사람들, 가정-사회적으로 불안한 이들, 특별히 사적계시에 몰두하는 이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끝까지 견디라 하신 그분 말씀을 따라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다고…. 다른 이들에게서 받는 미움이나 반대는 더 이상 박해가 아니라, 자신들의 뜻 내지 고집을 더 강하게 세우는 도구가 된다.

보통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는 ‘자신 때문’,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 때문이거나, ‘일 때문’이거나 시기나 질투하는 다른 ‘사람들’ 때문이다. 이러한 미움을 마치 자신의 신앙 때문에 받는 양 여기고 오히려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예수님도 웃으실 일이다. 예수님은 명확히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22절) 나 때문에도, 다른 사람들 때문에도 아닌 ‘내 이름 때문에’, 그것도 한두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때, 그것이 예수님 때문에 받는 신앙의 박해라는 것이다.

내가 겪고 있는 지금의 신앙적인 어려움들을 우리는 일단 박해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극복해야 할 과제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더 신앙적이리라.

주님, 사실 수없는 무혈의 박해자들이 오늘날 저희를 짓누릅니다. 더 이상 당신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인간적이고 본능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그것들’ 말입니다. 인간과 행복, 자유와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자리를 꽤 차고 있는 ‘그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장하는 사회와 구조 말입니다. 악의 ‘이리 떼’와 같은 ‘그것들’에게서 저희를 보호해 주소서. 저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7월 9일 연중 제14주일 : 마르 6, 1-6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예수님! 세상의 논리와 신앙의 논리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복음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혈연 학연 지연으로 대표되는 인간적인 끈들이 끝내는 추종과 믿음을 낳고 현실적 이득으로 연결 될 때가 많지만, 오늘 예수님과 고향사람들에게는 그렇지가 못하다. 말미에 예수님은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보통 여러 복음들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목격한 이들의 반응은 먼저 ‘놀라움’,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는 ‘믿음의 탄생’ 이다. 오늘 고향사람들의 반응도 처음에는 ‘놀라움’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놀라실 정도로 그들에게서 믿음은 탄생하지 않는다. 왜?

마리아의 아들 아이가…그 친척들도 우리가 다 알고 있고…고향사람들은 끊임없이 ‘인간적인 판단들’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후에는 예수님이 스스로 예언자라 칭하며 가르치셨기 때문인지 ‘불쾌해 하며’, 루카복음(4,16-30)에 따르면 마을 밖으로 쫓아내고 벼랑에서 떨어 뜨려 죽이려고까지 한다. 자신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은 믿음을 탄생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살인까지 저지르려는 집단적 분노로 발전해 버린다. 결국 이야기의 결과는 예수님께서 ‘몇몇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 외에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는, “예수님의 무기력함”이다. 반대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혜택 (은총)도 주어지지 않는다.

믿음이 없는, 믿음이 부족한 신앙공동체들에게 오늘 말씀은 전해주는 바가 크다. 하느님의 일은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믿음이 없는 이들 안에서’ 예수님은 ‘무기력하시고’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아무리 인간적으로 고민하고 해결하려 해도 좀체 끝이 보이지 않을 때, ‘공동체의 신앙’을 점검해 볼 일이다. 진정한 믿음이 없이 인간적으로만 판단하는 집단은 살인까지도 저지를 수 있다.

주님, 섬뜩합니다.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인간적인 판단이 ‘믿음 없이는’ 얼마나 큰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요. 저희가 당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인간적인 판단들을 멀리하고, 소박한 믿음 안에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우리 안에 계시는 당신과 당신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소서.

 

 


7월 16일 연중 제15주일 : 마르 6, 7-23
12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부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무엇보다 ‘복음 선포자’로 초대받고, ‘구마와 병자치유’의 일을 하게 된다. 말과 삶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먼저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이 외에는 아무것도…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무소유에 대한 가르침,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오늘날 더욱 되살려야 할 가치 있는 말씀이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오늘날 제자들을 파견하신다면, 인터넷도 끊고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말며 신용카드도 없애고 ‘자, 세상을 향해 떠나라!’ 하시겠는가? 결국 예수님의 ‘무소유’에 대한 요청은 자신과 자신이 가진 소유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과 ‘복음의 힘’으로 살라는 요청이며, 복음 선포자의 삶에 맞갖은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라.’는 요청이라 할 수 있다.

경제적 가치와 신앙적 가치, 대형화된 교회 안에서, 교회의 일 안에서 종종 부딪치게 되는 사안이다. 언젠가 교회의 잡지에 보통 수십억 원을 들여서 성전을 짓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비판한 글에 대해 다른 신부님들과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한 신부님의 말씀에 심히 공감이 갔다. “물론 겉모양 꾸미기와 무조건 대형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것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만 사용하는 성전을 수십억 원을 들여 짓는다면, 그것은 경제적 가치로 아주 불필요한 낭비요 가난해야 할 교회가 할 일이 아니니 필요 없다는 식의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한 주일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어떤 장소에서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 장소의 가치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성전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삶에서 종종 신앙은 경제적 가치나 사회적 가치에 밀려 버린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조차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무소유 선언은 바로 그러한 가치들을 앞서는 ‘믿음의 가치’로 자신의 삶을 재무장하고 복음을 전하라는 요청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가치가 믿음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떠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주님, 저희는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들 중 당신께 대한 믿음을 북돋우고, 당신과의 관계를 기억하고 깨닫게 해주는 것들이 도대체 얼마나 될런지요. 저희가 가진 모든 것을 통하여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을 드러내게 하소서. 그것이 아니라면 저희가 가진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제 몸과 마음조차도 당신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성령의 힘으로 저희를 다시 치유해주시고 다시 파견해 주소서.

 

 


7월 23일 연중 제16주일 : 마르 6, 30-34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이 말은 마치 예수님이 파견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휴가를 주는 듯이 들린다. 하지만 좀더 풀어서 번역한다면, “우리가 홀로 있을 수 있는 외딴 곳으로 (함께) 가자. 거기서 너희는 좀 쉬어라”이다. 바로 예수님은 제자들만 따로 쉬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휴식의 시간, 피정의 시간을 갖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함께’ 하는 휴식의 시간, 그것이 어떤 모양인지 오늘 복음 이야기는 들려준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복음 전파에 바쁘셨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가서 휴식의 시간을 갖고자 하였다. 하지만 배에서 내렸을 때, 그들은 먼저 달려와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하나였다면, 짜증부터 났을지도 모른다. 좀 쉬자! 하지만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그들을 보며 ‘측은한 마음’이 드신 예수님은 휴가도 잊은 채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한마디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휴식의 시간에도 복음 전파는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오늘 복음 장면이 바로 이어서 나오는 오병이어 기적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휴식은, 그들만의 휴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먹고 쉬는 ‘공동체의 휴식’으로 확대된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주시는 음식을 먹는 우리의 미사는 그래서 휴식 중의 휴식, 휴가 중의 휴가의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주의 미사가 억지로 참례해야 하는 의무가 아닌 주님께 초대받은 휴식의 시간이 될 수는 없을까?

곧 많은 이들이 어디론가 쉬러 떠난다. 예수님이 없는 휴식의 시간이라면, 그저 먹고 놀고 마시면 그만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이라면, 늘 그분과 함께 있고 당연 휴가도 그분과 함께 하는 휴가여야 하리라. 다른 이들에게도 눈을 돌리며….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주님, 이제 좀 푹 쉬고 싶다는 말을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휴식이 없고 계속되어야 함을 당신의 모범을 통해 봅니다. 당신이 없이는 당신과 함께 하는 시간이 아니라면, 저희에게 진정한 휴식이란 없음을 깨닫게 하소서. 또한 당신이 가실 곳을 미리 알고서 쫓아 간 군중들처럼, 저희도 언제나 당신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게 하소서.

 

 

 

7월 30일 연중 제17주일 : 요한 6, 1-15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은 네 복음서가 한결같이 전하는 이야기이다. 나해의 연중 주일복음이 마르코가 중심이라면,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당연 마르코복음의 오병이어 이야기가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놀랍게도 요한복음의 오병이어 기적을 소개한다. 왜?

다른 복음들에 비해 유독 길기도 하고, 자세하기도 하지만, 눈에 띄는 큰 차이중의 하나는 바로 누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느냐이다.

다른 복음들은 다 오병이어를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절) 한 아이! 어떻게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었는지, 부모도 함께 있었는지, 소년인지 소녀인지, 잘생겼는지 똑똑한지 복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한 아이’이다. 성숙한 어른이 아닌 아직은 약하고 더 커야 하는 존재인 아이, 그렇지만 ‘무언가 가지고 있었던’ 한 아이로 소개된다. 하지만 그 한 아이가 가진 오병이어로 인해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많은 사람들이 굶지 않고 배부르게 된다.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제자의 말이 무색하게 예수님은 아주 ‘작은 자’, 한 아이를 통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다.

복음들은 때때로 ‘제자’와 ‘어린 아이’를 동일시한다.(마태 10,42; 마르 9,41 참조)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아이든 제자들이든 누가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의 일에 있어서는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아이를 통해 ‘제자들’, 나아가 믿는 이들인 우리의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 더 밝혀진다 할 수 있다.

어린이요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는 한마디로 완성되지 않은 존재, 더 성숙해야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너무나 부족한 우리 존재의 그 무언가를 통해 (예컨대 우리의 작은 믿음을 통해) 예수님은 커다란 기적을,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내가 가진 무언가를 예수님께 내어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나의 그 무언가를 내놓을 줄도 알아야 하겠고, 내가 부족하다 여기는 그 누군가가 내어놓는 오병이어도 쉬이 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리라.

주님, ‘한 아이가 많은 이를 살리는’ 오병이어의 기적 안에서 ‘한 아기로 오시어 온 세상을 살리신’ 당신의 성탄을 떠올려 봅니다. 당신과 함께 하는 믿음 안에서 부족함은 넘침으로, 불완전은 완성으로, 미움마저 사랑으로, 죽음마저 다시 살아남으로 옮겨간다는 것을 저희가 잊지 않게 하소서. 저희의 부족함마저 당신 일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