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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김영호 신부

6월 4일 성령 강림 대축일 : 요한 20,19-23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에 대한 무서움은 제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잊게 합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것을, 죽음이 두려워서 지금 당장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조금 전만 해도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불안해 떨고 있었던 제자들. 그런데 예수님의 이 행동으로 인해 그들에게 있어서 두려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기쁨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용기를 주시는 협조자인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뵙고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변화됩니다. 즉 자신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나가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시는 분, 그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아직도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혹시 때를 못 맞춰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계속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6월 11일 삼위일체 대축일 : 마태 28,16-20
삼 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문득 학생 시절 즐겨보던  <영심이>라는 만화에서 영심이가 부르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 둘이면 둘이지 셋이겠느냐?”

삼위일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성부·성자·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계시지만 한 몸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이 말뜻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이신 하느님인데, 세 분이 있다는 것, 그런데 그 세 분이 또 한 분이라는 것, 정말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이 안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를 위한 것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계속 전달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무상으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베푸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에 그 베푸심을 계속해 나가고 계십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사랑을 전해주시기 위해 성격이 다른 세 위격이 하나가 되는 신비가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사랑의 신비를 모든 민족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랑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그 사랑을 계속해서 바라볼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위해 서로 다른 세 위격이 하나를 이루듯이, 서로 다른 우리 역시 주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를 이루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삼위일체의 신비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요?

 

 


6월 18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마르 14, 12-16.22-26
모 든 음식은 먹힘으로써 사라지지만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 또한 성체로서, 즉 음식으로서 우리에게 먹히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먹히심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렇지만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이 변화를 체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즉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의 마음 자세에 따라 우리도 변화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체를 어떠한 마음으로 모시든 상관없이 성체는 성체입니다. 별 생각 없이 성체를 영한다고 해서 성체가 그냥 밀떡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성체를 어떠한 마음으로 모시느냐에 따라 성체를 받아 모신 사람의 삶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정성껏 성체를 받아 모신 사람은 성체로 오신 예수님을 따라 자신을 성체로서 다른 이들에게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느낌 없이, 생각 없이 그저 의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성체의 삶과는 무관하게, 아니면 정반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을 내어놓기 보다는 자신의 것에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성체로서 우리의 밥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 역시 이웃의 밥으로 내어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곧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성체가 되어 이웃의 밥이 되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성체를 모시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의례적이거나 관성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예수님을 따라 자신을 내어놓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먹히는 삶’,’자신을 내어놓는 삶’,’손해 보는 삶’,’꼴찌가 되는 삶’,’나를 죽임으로써 모두를 살리는 삶’이 바로 성체의 삶일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삶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성체로서 우리에게 먹힘으로써 인간적인 어려움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셨는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이웃들의 밥으로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6월 25일 남북통일 기원 미사 : 마태 18,19-22
오 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라는 명언을 남겨주십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면 모두 490번 용서하고 491번째에는 용서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할 때, 마음의 평화와 함께 주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는 습관만 갖게 된다면 어렵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산길을 걸을 때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보다는 자주 다녀서 확실하게 길이 생긴 곳으로 자연스럽게 발길을 옮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길이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물론 그 길 역시 처음에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명이 지나고, 또 한 명이 지나고…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다 보니 길이 단단해지고 넓어지면서 편하고 쉬운 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렇게 어렵다는 용서도 그와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계속해서 용서하다 보면 그렇게 어려워 보이는 용서도 편하고 쉬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번 주간 보내시면서 딱 490번만 용서해보십시오. 아마 491번째에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